노르웨이 하면 떠오르는 화가와 그림?!
북유럽의 겨울 나라 노르웨이 하면 가장 먼저 뭐가 떠오를까? 세계에서 가장 긴 협만(峽灣)인 송네피오르, 오로라를 볼 수 있는 트롬쇠, 노벨평화상, 비틀스(Beatles)의 노래이자 하루키(Murakami Haruki) 동명 소설 < Norwegian Wood(노르웨이의 숲) >…
 

▲ 뭉크, <절규>, 1893년, 템페라, 91.3×73.7cm, 노르웨이 국립 미술관, 오슬로


필자의 머릿속에는 오드 하셀(Odd Hassel, 1897~1981)과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라는 이름이 인터넷포털 연관 검색어처럼 노르웨이와 함께 떠오른다. 하셀은 노르웨이 출신 물리화학자다. X선 회절법을 통한 분자의 결정구조를 연구해 사이클로헥세인(C6H12) 유도체의 화학구조가 입체적이라는 이론을 발표한 공로로 1969년 노벨화학상을 받았지만, 우리에게 그리 친숙한 이름은 아니다. 반면 뭉크는 이번 꼭지에서 다룰 노르웨이 출신 화가인데, 그가 그린 <절규>는 미술과 친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한두 번은 본 기억이 있을 만큼 유명하다. 실제로 뭉크는 노르웨이에서는 국민화가로 불릴 만큼 중요한 인물이다. 노르웨이 화폐에 그의 작품과 초상이 나올 정도다.

 

뭉크와 그의 대표작 <절규>가 노르웨이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노르웨이 릴레함메르(Lillehammer)란 도시에서 동계 올림픽이 열렸던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절규>는 오슬로에 있는 노르웨이 국립 미술관에 보관 중이었는데,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졌다. 곧 올림픽이 열리면 전 세계인들이 노르웨이를 찾을 것이고 뭉크의 <절규>를 보기 위해 미술관에 들를 텐데 노르웨이 정부로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범인을 잡아 그림을 되찾기에 골몰했던 노르웨이 경찰국에서는 기지를 발휘했다. 누군가 천문학적인 거금으로 <절규>를 사고 싶어 한다는 거짓 정보를 흘렸고 이에 솔깃한 범인이 나타난 것이다. 이를테면 함정수사 같은 것이다. 다행히 범인을 잡아 그림을 되찾을 수 있었다. 범인은 ‘팔 엥게르’라는 전직 축구선수였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2004년경 <절규>가 다시 한번 탈취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오슬로에 있는 뭉크 미술관 전시실에 복면을 쓴 세 명의 무장 괴한이 들이닥쳤다. 한 사람은 총으로 보안요원을 위협했고 다른 한 사람은 벽에 걸린 <절규>와 <마돈나>를 떼어 내어 도주했다. 전시실 안에 있던 수십 명의 관람객들은 놀란 나머지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2년 동안의 우여곡절 끝에 그림을 되찾았고, <절규>는 다시 한번 전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탔다.

 

뭉크가 그린 붉은색 구름
2012년경 뭉크의 <절규>가 또 다시 외신에 등장했다. ‘이 그림 또 도둑맞았나 보다’하고 지레짐작했는데, 이번에는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로 팔렸다는 소식이었다. 뭉크가 그린 네 점의 <절규> 가운데 유일하게 개인이 소장하고 있던 것이 1억 1990만 달러(당시 한화 약 1321억 원)에 팔렸다. 흥미로운 건 그림이 도난당하는 일을 겪을수록 그림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는 사실이다. 희대의 도난사건이 그림의 가치를 올리는 최고의 마케팅 전략이 된 셈이다.

 

그 뒤로 한동안 조용했던 뭉크의 <절규>가 다시 외신에 등장한 건 뜻밖에도 노르웨이 기상학자들의 독특한 연구 때문이었다. 2017년 7월에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열린 유럽지구과학연맹(EGU) 회의에서 오슬로대학교 지구과학과 헬레네 무리(Helene Muri) 박사는, 뭉크가 <절규>에서 자개구름(nacreous cloud)을 그렸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해 주목을 끌었다.
 

▲ 자개구름 사진(출처: 세계기상기구)


자개구름은 진주조개처럼 아름다운 분홍색과 녹색으로 빛난다고 해서 진주구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일출 전이나 일몰 후 태양이 수평선보다 낮을 때 특히 아름답게 빛난다. 자개구름은 구름 자체에 색이 있는 게 아니라 태양광이 굴절·반사되면서 붉고 푸른 빛이 뒤섞여 나타나는 현상이다. 무리 박사는 20년 넘게 오슬로에서 거주하면서 자개구름을 한차례 목격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자개구름이 발생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높은 고도와 적절한 습도, 매우 낮은 기온이 유지되어야 한다. 고도 20~30km에 있는 겨울철 성층권이 여기에 해당된다.

 

뭉크의 <절규>에 등장하는 하늘을 기상학적으로 연구한 것이 무리 박사가 처음은 아니었다. 2004년경 미국 텍사스 대학교 천체물리학과 도널드 올슨(Donald W. Olson) 박사는 <절규>에 나오는 하늘이 1883년 인도네시아 크라카타우(Krakatau)섬에 있는 화산이 폭발을 일으켰을 때 그 영향으로 발생한 것이라는 연구 결과를 「Sky & Telescope」라는 저널에 발표했다. 엄청난 규모의 화산 폭발로 인해 암석의 파편들이 전 세계 대기 중에 퍼졌는데, 심지어 뭉크가 사는 북유럽 노르웨이의 하늘까지 붉게 물들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화산재는 파장이 짧은 파란빛은 주변으로 산란시키고 파장이 긴 붉은 빛만 그대로 통과시키기 때문에 하늘을 붉게 만든다. 뭉크가 바로 그 엄청난 광경을 목도한 뒤 <절규>를 그렸다는 것이다.
 

▲ 뭉크의 <절규> 속 하늘과 자개구름 비교(출처: 유럽지구과학연맹)


자개구름을 촬영한 사진은 세계기상기구(WMO)를 비롯한 기상 관련 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 모습이 뭉크의 <절규>에 등장하는 하늘과 닮았다.

 

사람의 절규? 자연의 절규!
뭉크는 <절규>를 그리기 전인 1892년 1월의 어느 날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해질녘에 친구 두 명과 길을 걷고 있었다.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멈춰 서서 난간에 기대어 말할 수 없는 피곤을 느꼈다. 불의 혀와 피가 검푸른 피오르드 위 하늘을 찢는 듯했다. 친구들은 계속 걸었고 나는 뒤로 쳐졌다. 오싹한 공포를 느꼈고 곧 엄청난 자연의 비명소리를 들었다.”


일기대로라면 뭉크는 분명히 자개구름을 목도한 게 맞다. <절규>는 화폭이 91.3×73.7cm(세로×가로)로 1미터가 채 되지 않지만,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의 표정과 색채는 매우 강렬하다. 핏빛 하늘 아래 흐늘거리는 사람이 해골 같은 얼굴을 감싸고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과학자들의 연구·분석과 상관없이 미술계 전문가들은 뭉크의 <절규>를 인간의 보편적 고통을 표현한 작품으로 해석한다. 그림 속 인물이 길가에서 자연의 외부적인 힘에 반응하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뭉크가 표현한 부분이 실제적인 힘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심리적인 것이었는지에 대해서 논쟁이 이어져왔다.


뭉크가 이 그림에 맨 처음 붙인 제목은 ‘자연의 절규’다. 그의 일기에도 ‘엄청난 자연의 비명소리’라는 말이 등장한다. 뭉크가 일기에 썼던 단어는 노르웨이어 ‘skirk’인데, 영어로 ‘shriek’ 혹은 ‘scream’과 같다. 우리말로 옮기면 ‘절규’ 혹은 ‘비명’이 된다.

 

영국 박물관 큐레이터 바트럼(Giulia Bartrum)은 뭉크가 일기에 쓴 표현대로 사람이 절규하는 게 아니라 ‘자연의 절규’를 듣고 놀라는 장면을 그린 것이라고 해석했다. 바트럼의 해석은 앞에서 소개한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뒷받침한다. 그림 속 인물인 뭉크가 정신착란적인 자신의 심리상태를 그린 게 아니라 실제로 그가 봤던 자개구름에 덮인 하늘을 그렸다는 얘기다. 뭉크는 일기장에 그 어마어마한 광경을 목도한 순간을 ‘자연의 비명소리’로 썼고, 바로 그 기억을 <절규>라는 그림으로 남긴 것이다.

 

죽음을 그릴 수밖에 없는 운명
뭉크는 자기가 그린 그림을 자신의 일부로 여겼고 그림이 팔리면 똑같은 그림을 다시 그려 두곤 했다. 뭉크는 1893년에 <절규>를 그린 뒤 1910년까지 같은 그림을 세 장 더 그렸을 정도로 이 그림에 애착이 컸다.

 

<절규>는 뭉크의 작품 세계에서 큰 축을 형성한 ‘생의 프리즈(Frieze of Life)’ 시리즈 가운데 하나다. 프리즈는 벽 윗부분에 거는 길고 좁은 액자인데, 뭉크는 삶과 죽음, 공포와 불신, 팜 파탈의 유혹과 허무한 사랑 등을 연작의 형식으로 그린 다음 이를 ‘생의 프리즈’라는 이름의 카테고리로 묶었다. 뭉크는 1893년 12월 베를린 전시회를 시작으로 1900년까지 ‘생의 프리즈’ 연작들을 발표했는데, 그림에 담긴 어둡고 파격적인 주제로 자주 논란을 일으켰다. 훗날 뭉크는 ‘생의 프리즈’ 연작을 통해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고백했다고 밝혔다. 그림으로 쓴 자서전이었던 것이다.
 

▲ 뭉크, <지옥에서의 자화상>, 1903년, 캔버스에 유채, 82×66cm, 뭉크 미술관, 노르웨이 오슬로


뭉크의 인생과 예술을 몇 가지 키워드를 들어 설명한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죽음’이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병약했을 뿐 아니라 어려서부터 가족들의 죽음을 보며 자랐다. 강박증이 심한 성격이상자인 아버지로부터 방패가 돼 주던 어머니는 뭉크가 다섯 살 되던 해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그가 열네 살 되던 해에는 늘 따뜻하게 대화를 나눴던 한 살 위 누이가 같은 병으로 세상을 등졌다. 뭉크 역시 열두 살에 건강 악화로 한동안 학업을 중단해야만 했다.

 

뭉크는 청년이 되었을 때도 여전히 쇠약했다. 스물한 살에 장학금을 받고 파리 유학의 기회를 얻었지만 또 다시 몸져누우면서 포기해야만 했다. 그리고 스물여섯 살 때 아버지마저 눈을 감았다.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의 형제 중에 유일하게 결혼을 한 동생 안드레아가 결혼 몇 달 만에 목숨을 잃었고, 여동생 로라도 어려서부터 정신병원을 들락거리더니 쉰 살이 되기 전에 사망했다. 그로부터 5년 뒤에는 어머니를 대신해 뭉크를 보살펴주었던 카렌 이모까지 숨을 거뒀다. 뭉크는 평생 가족의 불행과 죽음을 안타깝게 지켜봐야 하는 기구한 삶을 살았다. 그의 인생에서 죽음, 공포, 불안, 질병, 우울을 빼면 기억에 남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이러한 뭉크의 불행한 삶은 그의 예술의 핵심 주제가 됐다. <병든 아이>(1886년), <절망>(1892년), <절규>(1893년), <불안>(1894년), <병실에서의 죽음>(1895년), <영안실>(1896년), <죽은 엄마와 딸>(1899년), <지옥에서의 자화상>(1903년) 등의 작품들은 당시 그의 삶을 투영한다.

 

뒤틀린 사랑
뭉크의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테마는 ‘실연’이다. 그는 너무 어려서 어머니와 누나의 죽음을 겪으며 평생 애정결핍증의 굴레에 갇혀 살아야 했다. 뭉크가 여인과의 키스나 열애 같은 주제를 많이 다룬 이유는 어려서부터 뼛속까지 느꼈던 외로움 탓이기도 하다.
 

▲ 뭉크, <흡혈귀>, 1895년, 캔버스에 유채, 91×109cm, 뭉크 미술관, 노르웨이 오슬로


뭉크는 몇 번의 뜨거운 연애를 경험했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뭉크가 사랑했던 이성의 대상도 평범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일찍 알아봐 준 화가이자 후원자 프리츠 탈로(Frits Thaulow, 1847~1906)의 형수를 열정적으로 사랑했다. 하지만 그녀의 자유분방한 생각과 행실은 뭉크를 질투와 불안에 떨게 했다. 그의 뜻대로 이루지 못한 사랑에 허무주의 작가 한스 예거(Hans Jæger, 1854~1910)의 영향까지 더해져 그 시절 뭉크는 여인, 질투, 키스를 반복해서 그렸다. <흡혈귀>(1893년), <사춘기>(1894년), <마돈나>(1894년), <질투>(1895년), <키스>(1897년) 같은 작품에서 실연의 상처와 여성에 대한 배신, 혐오 등을 엿볼 수 있다.

 

서른 살 이후에도 뭉크의 불안한 사랑은 계속됐다. 그는 서른네 살 때 툴라 라르센(Tulla Larsen)이라는 상류층 여인을 만나면서 잠시 안정된 삶을 누렸다. 그 시절 작품인 <다리의 소녀들>(1899년)이나 <삶의 춤>(1900년)을 보면 뭉크의 작품이 다소 밝아졌음을 느낄 수 있다.
 

▲ 뭉크, <살인녀>, 1906년, 캔버스에 유채, 110×120cm, 뭉크 미술관, 노르웨이 오슬로


하지만 라르센과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라르센은 매달리듯 끈질기게 청혼했지만 뭉크는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라르센은 뭉크와의 말다툼 끝에 권총으로 위협하다 실수로 뭉크의 손가락에 총을 쏘고 말았다. 이 일로 뭉크의 여성혐오증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뭉크는 끊임없이 사랑을 찾아 방황했지만 자신의 곁에 머물던 여인들은 모두 흡혈귀 같은 살인자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살인녀>(1906년)와 <마라의 죽음>(1907년)이 그 시절 뭉크가 그린 그림이다.

 

죽음으로써 죽음이란 굴레에서 벗어나다
20세기 초는 나치즘과 파시즘이 득세하면서 유럽 전역을 전쟁의 공포로 질식시키던 때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뭉크의 어둡고 우울한 그림들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공감을 사며 큰 인기를 누렸다. 뭉크는 1933년경 프랑스 정부로부터 명예훈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뭉크의 삶은 불행했다. 가족의 병과 죽음으로 어려서부터 불안과공포에 시달려야 했고, 어른이 되어서도 신경쇠약을 달고 살았다. 사람들과의 관계는 늘 삐걱거렸고, 특히 여성들과 불화했다. 노년으로 갈수록 혼자 지내는 고독한 시간이 늘어나면서 오로지 그림에만 빠져 살았다.


뭉크가 겪었던 정신적 고통을 지켜본 사람들은 그가 머지않아 세상을 등질 거라고 수군거렸다. 뭉크의 내면은 허무와 죽음이 지배했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죽음밖에 없다고 뭉크 스스로도 입버릇처럼 얘기했다. 하지만 뭉크는 꽤 장수한 화가였다. 항상 죽음을 생각하며 죽음을 주제로 많은 그림을 남겼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은 긴 세월을 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뭉크, <침대와 시계 사이의 자화상>, 1940~1943년, 캔버스에 유채, 149.5×120.5cm, 뭉크 미술관, 노르웨이 오슬로


뭉크는 노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삶의 허무를 그리는 데 몰두했다. 여든을 앞둔 1942년에 그린 <침대와 시계 사이의 자화상>에서는 자신의 삶이 거의 종착지에 다다랐음을 묘사했다. 그림 속 침대와 시계 사이에 서 있는 노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는 듯하다. 그로부터 2년 뒤 뭉크는 오랜 번민을 끝내고 영면했다.

 

 

필자 / 전창림(화학자) 전 홍익대학교 바이오화학공학과 교수

한양대학교 화학공학과와 동 대학원 산업공학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 파리 국립 대학교(Universite Piere et Marie Cuire)에서 고분자화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파리 시립 대학교에서 근무 후 귀국한 뒤 한국화학연구소에서 선임연구원, 홍익대학교 바이오화학공학과 교수로 재직 후 은퇴했다. 고분자화학과 색채학, 감성공학에 대한 많은 논문을 발표했으며, 지은 책으로 <미술관에 간 화학자>(어바웃어북), <미술관에 간 화학자 : 두 번째 이야기>(어바웃어북) 등이 있다.

 

※ 이 칼럼은 해당 필진의 개인적 소견이며 삼성디스플레이 뉴스룸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