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조선의 4대 화가라고 하면 안견, 정선, 김홍도, 장승업을 꼽는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김홍도를 빼고는 조선회화를 이야기할 수 없다. 몇몇 소설과 영화, 드라마 같은 데서 김홍도가 제자 신윤복을 넘지 못하는 자신의 재능을 탄식하는 스승으로 묘사되기도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픽션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 신윤복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조선회화사에서 신윤복이 김홍도를 뛰어넘는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 김홍도, < 씨름 >, 제작 연도 미상, 종이에 담채, 39.7×26.7cm, 국립 중앙 박물관

 

김홍도(1745~?)의 본관은 김해, 자는 사능(士能), 호는 단원(檀園), 서호(西湖), 취화사(醉畵士), 고면거사(高眠居士), 첩취옹(輒醉翁), 단구(丹邱) 등을 사용했다. 어렸을 때 당대 최대의 문인화가인 강세황(1712~1791)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워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1771년(영조 47년) 정조 이산의 초상화를 그려 유명해졌으며, 스물여덟 살인 1773년에는 어용화사(御用畵使: 임금의 용안을 그릴 수 있는 전속 화가로 서양의 궁정화가에 해당한다)로 발탁되어 어진화사(御眞畵師: 임금의 용안을 그리는 중요한 국정 행사)에서 영조의 용안을 그렸다. 1791년에는 정조 어진 원유관본(遠遊冠本)을 그린 공으로 충북 연의 현감에까지 임명되어 1795년 정월까지 봉직했다. 현감 퇴임 뒤에는 경제적 곤궁과 질병으로 고생스러운 말년을 보냈다.


김홍도는 산수화, 인물화, 기록화 등 모든 장르에 능했고, 특히 그의 풍속화는 우리 전통 화단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큰 유산이다. 조선 후기 서민들의 생활상을 치밀한 구성에 해학을 곁들여 감칠맛 나게 표현한 김홍도의 풍속화는 중국화와 차별되는 우리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이룩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한국적 화풍은 신윤복을 비롯한 조선 후기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과학자마저 탄성을 지르게 하는 치밀한 구도와 시선


김홍도 풍속화 가운데 특히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그림이 바로 <씨름>이다. 이 그림은 보물 527호로 지정된 『단원풍속도첩』에 들어 있는 25점의 그림 중 하나이다.


당시 단오가 되면 남정네들은 씨름판을 벌이거나 활쏘기 시합을 하였고 여인들은 그네타기와 창포에 머리를 감았다. 단오가 음력 5월 5일이므로 서로 돌려가며 도와주는 모내기를 막 마치고 한껏 부푼 풍년의 기대를 마을 전체가 함께 즐겼던 것이다.

 

▲ < 씨름 >의 이방진 구조


< 씨름 >은 구도가 매우 절묘하다. 씨름꾼 두 사람이 가운데 있고 그 주위를 구경꾼들이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는 원형 구도이다. 그런데 군중들은 네 무리로 나뉘어 있다. 위의 오른쪽 무리는 다섯 명인데 앞에 놓인 뾰족한 벙거지를 보면 하층민인 말잡이이고 그 주위의 네 명도 비슷한 낮은 계급의 사람들로 보인다. 그 왼쪽 무리는 여덟 명인데 대체로 양반들인 것 같다. 대부분 갓을 쓰고 있다. 그 아래 왼쪽에는 엿장수를 포함하여 다섯 명의 무리가 있고 그 오른쪽에는 다시 두 명이 배치되어 있다.


대각선으로 무리의 수를 더한 값은 모두 10으로 둘 다 같다. 일종의 이방진인 셈이다. 이것은 지루하지 않게 다양성을 주면서도 절묘한 균형을 이루는 구조이다.


김홍도는 역동적인 주제인 씨름을 그리면서 매우 독창적인 장치들을 여기저기 설치해 놓았다. 일단 씨름꾼에게로 시선이 모이도록 원형 구도를 택했다. 그러나 모이기만 하면 답답해지므로 오른쪽은 탁 틔어 놓았다. 또 모든 구경꾼의 시선이 가운데로만 모이지 않는다. 엿장수는 전혀 딴청을 피우고 딴 방향을 보고 있어 긴장 속에서도 해학을 보여준다.


이 그림이 역동감을 주는 중요한 장치가 두 가지 더 있다. 하나는 상하 무게의 뒤바뀜이다. 보통 그림은 아래가 무겁고 위쪽이 가벼워 안정감을 준다. 그런데 이 그림은 위쪽에 아래쪽보다 월등히 많은 구경꾼을 배치하여 불안정한 느낌을 준다. 이 불안정성이 특별한 역동감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아래쪽인 관객 쪽보다 위쪽이 더 무거움으로 인해 그림 자체가 앞쪽 관객 방향으로 쏟아질 것 같은 긴박감을 준다.


또 씨름꾼의 자세를 살펴보면, 들배지기를 당한 씨름꾼이 앞쪽으로 넘어지는 순간을 그려서 마치 3D 영화에서 화면이 관객 쪽으로 쏟아지며 관객들의 탄성을 자아내는 듯한 순간을 재현하였다. 이 얼마나 절묘한 장치인가!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다. 더욱 놀랄만한 장치가 그림 속에 숨어 있으니, 다중시점(눈높이)이라는 고급 기법이다. 구경꾼들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그렸다. 둥글게 앉아 있는 판을 형성한 것이다. 그러나 그 판 위에서 씨름을 벌이는 두 사람은 땅바닥에서 위로 쳐다보는 시선으로 그렸다. 한 그림에 각기 다른 두 시점이 존재하는 것이다. 비범한 역동감이 생기는 것은 이처럼 복잡한 계산에 의한 결과이다.


그림 속 씨름 시합에서는 누가 이길까?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미 답이 나와 있음을 알 수 있다. 뒤쪽에 있는 씨름꾼은 들배지기를 당하여서 들려 있다. 표정도 양미간이 심하게 일그러져 있다. 이와 반대로 등을 보이고 있는 씨름꾼은 이를 악물고 넘기기 위해 마지막 용을 쓰고 있다. 자신감 넘치고 다부진 표정이다. 두 다리도 힘 있게 뻗치고 있다. 그런데 진짜 승부는 구경꾼이 먼저 알았다. 오른 아래쪽 두 구경꾼은 다급하게 몸을 뒤로 빼며 놀란 표정이다. 들배지기를 당한 사람이 자기들 쪽으로 넘어져 올 것을 몸으로 나타내고 있다.


거장의 실수 혹은 광학이성질체의 예술적 표현?

 

▲ 김홍도, < 무동(舞童) >, 제작 연도 미상, 종이에 담채, 27×22.7cm, 국립 중앙 박물관


< 씨름 >을 자세히 감상하다 보면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눈에 들어온다. 김홍도와 같은 거장이 실수할 리가 없다지만 그림 아래 오른쪽 두 구경꾼 중 하나의 손이 이상하다. 왼손과 오른손을 바꿔 그렸다. 이런 현상은 그의 또 다른 걸작 <무동>에서도 나타난다. 앞쪽 오른쪽에서 등을 보이고 해금을 타는 사람의 손을 보면 줄을 타는 왼손이 이상하다. 해금도 기타처럼 목을 왼손으로 밑에서 감싸 쥐어야 하는데 마치 오른손으로 감싼 것처럼 그렸다.

 

▲ (좌) 오른손과 왼손의 광학 이성질체, (우) <무동>의 나선형 구조


이 두 그림 모두 왼손과 오른손을 바꿔 그린 셈이다. 오른손과 왼손은 형태는 같은데 겹치진 않는다. 유기화학물질 중 화학식은 완전히 똑같은데 겹치지는 않아서 사실은 다른 물질이 되는 것을 광학이성질체(chirality)라 하고 그렇게 오른손과 왼손 관계에 있는 것을 키랄(chiral)이라고 한다. 대가가 실수를 그것도 두 번씩이나 하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혹시 김홍도는 유기화학의 광학이성질체를 그린 것은 아닐까? 똑 같지만 겹쳐지지 않은 것!


김홍도는 <무동>에서도 절묘한 역동성을 나타내는 또 다른 장치를 시도한다. 구도는 역시 원형 구도인데 나선형으로 도는 구도이다. 구도만 아니라 농담(濃淡)으로도 나타내었다. 앞에서 춤을 추는 소년의 필체가 가장 진하고 그 옆 아래쪽 해금 타는 사람이 다음으로 진하며, 이어 대금 부는 사람, 피리, 장구, 좌고 순으로 나선형으로 점점 옅어진다. 절묘한 역동감이다.


특히 춤추는 아이를 그린 필체는 서양화에서는 볼 수 없는 붓의 필력으로 담은 신묘한 율동감을 자아낸다. 이런 필력은 서양화의 붓으로는 절대로 표현할 수 없는 선이다. 서양화에서 쓰는 붓과 한국화에서 쓰는 붓은 겉모양은 비슷하지만, 그 구조가 전혀 다르다. 서양화에서는 모두 같은 털을 사용하여 단순하게 만든 붓을 사용하지만, 한국화에서 사용하는 붓은 중심에 심(心)이라는 다른 털이 끼워져 있다. 부드럽고 가는 털과 달리 조금 더 강한 털을 중심에 심었기 때문에 유연하면서도 탄력이 있다. 그래서 큰 붓으로 가늘고 섬세하게 그리는 기법이 가능하다. 즉, 서양화에서는 칠하는 부분의 크기에 따라 여러 크기의 붓을 준비하여 바꿔가며 사용한다. 반면, 한국화는 좀 크게 보이는 붓 하나로 큰 모양과 섬세한 필치까지 모두 소화한다. 우리의 전통 붓이라야 가능한 일이다. 한국화에서는 필력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일필휘지(一筆揮之)를 가능하게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붓에 사용한 털의 종류도 매우 다양하다. 토끼, 너구리, 양, 말, 고양이, 쥐, 담비, 늑대, 다람쥐, 여우, 소, 물소, 곰, 돼지, 학, 백조 등 거의 모든 동물의 털을 사용한다. 붓의 털끝은 칼을 사용해 다듬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끝을 모아서 만든다. 그래야 붓끝이 자연스럽게 모이고 물을 머금는 정도가 일정하다. 특히 ‘인태발’이란 것이 있는데 이것은 사람이 태어나서 한 번도 자르지 않은 머리털로 만든 붓이다. 조선시대 사대부집에서는 아들이 태어나면 어렸을 때의 원래 모발을 얼마큼 모아서 인태발로 붓을 만들어 두었다가 장성하여 과거를 보러 갈 때 그 붓을 내어주곤 하였다.

 


오른손과 왼손은 같은 형태로 보이지만 사실은 다른 형태로서 겹치지 않는다. 왼손은 오른손을 거울에 비친 상의 형태를 보인다. 이런 형태가 화학 분자에도 적용된다. 1960년경 유럽에서는 입덧완화제로 쓰이는 탈리도마이드라는 약을 복용한 임산부들이 기형아를 출산하여 문제가 되었다. 탈리도마이드는 거울상이성질체를 갖고 있는 물질로서 오른손 모양을 한 탈리도마이드는 입덧완화의 순기능을 하는 물질이었으나 왼손 모양을 한 탈리도마이드는 유전자변형을 일으킨다는 무서운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이같이 입체이성질체는 형태와 물리화학적 물성은 매우 비슷하지만, 생리의학적인 차이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때때로 오른손 형태는 약이 되고 왼손 형태는 독이 되기도 한다. 카르본이라는 분자도 R형은 스피아민트향이 나고, S형은 케러웨이향이 난다.

 


이러한 입체이성질체란 화학식이 같은 두 분자가 결합 순서만 바뀌어 다른 형태를 이루는 현상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기하이성질체와 광학이성질체가 있다. 거울상이성질체는 광학이성질체이며, 기하이성질체에는 시스-트랜스 구조가 있다. 탄소에 각기 다른 네 개의 치환기가 결합해 있을 때 그 탄소를 비대칭(chiral) 탄소라고 하며, 비대칭탄소가 있어야 광학이성질체가 존재한다. 빛은 파동을 가지고 있어서 360도 사방으로 파동을 치면서 원통과 같이 직진하는데 한 방향으로만 파동을 치면서 얇은 판과 같이 직진하는 빛을 편광이라고 한다. 편광이 광학활성 물질을 통과하면 오른 방향이나 왼 방향으로 회전하기 때문에 광학이성질체라고 한다. 이 현상은 프랑스의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 ~1895)가 처음 밝혀냈다.

 


거울상이성질체를 표현하는 방법은 d/l, D/L, R/S, (+)/(-) 등이 있다. 편광이 오른쪽으로 회전하는 것을 라틴어로 오른쪽을 뜻하는 데서 유래한 dextrorotatory 즉 ‘d’ 또는 (+)라고 명명하고, 왼쪽으로 회전시키는 것은 levorotatory 즉 ‘l’ 또는 (-)로 구분한다. 당이나 아미노산 같은 생체물질에는 종종 비대칭탄소가 하나 이상 존재하여 D/L로 구분해 부르기도 한다. 이들은 직접 편광실험을 해 보아야 알 수 있는데, 화학구조만 보고 구분하는 체제가 R/S이다.  R, S, D, L과 실제로 편광 빛이 회전하는 방향은 다를 수 있다.

 

필자 / 전창림(화학자) 전 홍익대학교 바이오화학공학과 교수


한양대학교 화학공학과와 동 대학원 산업공학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 파리 국립 대학교(Universite Piere et Marie Cuire)에서 고분자화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파리 시립 대학교에서 근무 후 귀국한 뒤 한국화학연구소에서 선임연구원, 홍익대학교 바이오화학공학과 교수로 재직 후 은퇴했다. 고분자화학과 색채학, 감성공학에 대한 많은 논문을 발표했으며, 지은 책으로 < 미술관에 간 화학자 >(어바웃어북), < 미술관에 간 화학자 : 두 번째 이야기 >(어바웃어북) 등이 있다.


※ 이 칼럼은 해당 필진의 개인적 소견이며 삼성디스플레이 뉴스룸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