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
최근 3년여간 팬데믹의 여파로 사람과 사람 간의 교류는 줄어들고 격리된 각자의 시간이 늘어나며, 우리는 보다 많은 시간을 디지털 세상에 투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딘가를 가기에 또 누군가와 만나기엔 녹록지 않은 현실 때문에 유튜브,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 메타버스에서 소통을 대신하게 되었죠.
 

▲ 오스틴 리는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감정이나 어떠한 경험 혹은 기억에 남아있는 이미지 잔상들을 아이패드나 포토샵 프로그램과 같은 디지털 매체를 사용해 기록한다. 그 후 작가는 이 디지털 이미지들을 페인팅이나 조각, 애니메이션, 프린트 등의 물리적인 작품으로 완성한다.


디지털의 이미지가 익숙해진 우리 시대의 예술은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많은 예술가가 자극적인 이미지가 넘쳐나고 그에 중독돼 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우려하며 다양한 방식의 예술을 선보여 왔습니다. 그 중 ‘오스틴 리’는 이미 20여 년 전부터 자신만의 방식으로 디지털과 실존, 즉 가상과 현실을 오가며 예술을 선보여 온 이 분야의 선구자에 해당하는 예술가입니다.
 

▲ 미국의 조각가 조지 시걸의 <퍼스널 컴퓨터를 바라보는 사람>을 오마주한 작품, <거울(Mirror)>


현재 국내에서 볼 수 있는 그의 작품 중 <거울(Mirror)>을 보면 컴퓨터 화면 속에 보이는 자신에게 빠져 멍하니 있는 조각상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오스틴 리가 태어난 해인 1983년에 출간된 타임지 표지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입니다.
 

▲ 조각상 <거울(Mirror)>과 영상으로 제작된 , 어쩐지 PC와 스마트폰을 의미 없이 바라보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과 닮았다.


늘 정치인, 연예인, 과학자, 스포츠 선수 등 사람을 표지 주인공으로 싣던 타임지가 1983년 처음으로 사람이 아닌 대상을 표지의 주인공으로 삼았는데, 이는 미국의 조각가 조지 시걸의 <퍼스널 컴퓨터를 바라보는 사람>이라는 작품이 표지로 등장한 것이었고 이 사건이 오스틴에게 영감을 준 것입니다. 조지 시걸의 작품은 20세기 말 컴퓨터 기술의 발전이 인간을 새로운 시대로 이끌 것이라는 예언과도 같은 작품이었고, 40년이 지나 그 예언이 완성된 시대를 살고 있는 오스틴은 조지 시걸의 작품을 오마주해 컴퓨터에 빠져 사는 현대인의 초상을 이처럼 제작했습니다.

 

 

예술가가 된 컴퓨터 매니아
오스틴 리는 디지털을 기반으로 현대적인 예술을 선보이는 가장 동시대적인 예술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며 미술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1983년생으로 아직 신진작가로 분류해도 될 만큼 젊은 나이이기에, 오스틴 리의 작품에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컴퓨터와 디지털 기술이 급변하는 과도기를 살아온 오스틴은 스스로를 ‘예술가이자 컴퓨터 너드’라고 이야기할 만큼 컴퓨터 기술 매체에 관심이 많았고, 이는 타일러 예술학교를 졸업하고 예일 예술대학교에서 회화 전공 석사 학위를 취득한 그에게 참신한 재료가 돼 주었습니다.
 

▲ (앞) Joy, 2023, Bronze / (뒤) Butterflies, 2023, 영상


대학에서 처음 컴퓨터 기술을 접하기 시작했을 땐, 상대적으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어도비 포토샵(Adobe Photoshop)을 기반으로 작품을 선보여 왔습니다. 이후 VR을 통해 이미지와 조형을 제작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고, 현재는 오큘러스 리프트(Oculus Rift)의 미디움(Medium)을 활용해 가상의 스튜디오에서 자신의 작품을 만들고 있는 예술가가 바로 오스틴 리입니다.

 

▲ 이번 서울 전시를 위해 특별히 선보이는 (앞) <파운틴(Fountain)> / (뒤) <타이트로프(Tightrope)>, 무기력하게 바닥에 누워 입 속의 물을 내뿜고 있는 인물의 형상은 작가의 자화상이다. 물이 작은 폭포를 이루고 춤을 추듯 흘러가는 모습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가 교차하는 시간을 함축적으로 담아낸다. 또, 정적인 푸른 빛과 떨어지는 물소리는 공간에 심리적 안정을 주고,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는 명상의 순간을 선사한다.


하지만, 오스틴이 만약 디지털로만 작업물을 선보이는 예술가였다면, 그는 예술가보다는 애니메이터나 영상 제작자로 정의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단순히 디지털 이미지나 영상만 제작하는 것이 아닌, 디지털 세상에서 자신만의 오리지널 이미지와 영상을 만들어 내고 이를 기반으로 우리가 존재하는 현실 세계에 실존하는 그림이나 조각으로 다시 제작합니다. 이것이 그가 예술가로 정의될 수 있는 이유이자 특별함입니다. 한때 메타버스가 유행처럼 번지며 캔버스에 그린 유화나 청동 조각을 블록체인 기술이란 이름 아래 암호화한 디지털 이미지로 변환시켜 가상 세상에서 거래하는 NFT가 투기시장에 붐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다수의 예술가가 또 다른 작품 판매 시장이라고 생각하며 현실 세계의 작품들을 디지털화하려고 고민할 때, 오스틴은 이미 이러한 시대가 올 것이란 걸 예측이라도 한 듯 디지털로 오리지널을 먼저 제작하고 이를 실제화하는 역순의 과정을 통해 디지털 시대를 가장 잘 읽어내고 풍자하는 작가로 미술계에 자신을 알려왔습니다.

 


CMYK가 아닌 RGB 색을 선보이는 예술가
 

▲ CMYK와 RGB 컬러 모델의 차이


오스틴 리가 작품을 통해 선보이는 색에는 기존의 미술사에서 만나 보기 어려웠던 특별함이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색을 구현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감산 혼합이라고 이야기하는 CMYK는 시안, 마젠타, 옐로, 블랙을 기본색으로 혼합해 색을 구현하는 방식으로, 잉크와 물감 등 인쇄물이나 회화 작품에서 목격하게 되는 색 구현 방법입니다. 이는 물질세계의 색 표현 방식이기에 색이 섞이면 섞일수록 탁해져서 교집합이 될수록 검은색에 가까워집니다. 반대로 가산 혼합이라고 이야기하는 RGB는 빛의 3원색인 레드, 그린, 블루를 기반으로 색을 구현하는 방식이며 모니터, 스크린, 무대 조명 등에 사용됩니다. 이는 색이 섞이면 빛의 농도가 높아져 교집합이 되면 흰색, 즉 빛에 가까워집니다.
 

▲ Joy, 2023, 캔버스에 아크릴

수작업 방식으로 제작한 작품이지만 어쩐지 현실성이 결여된 묘한 느낌을 준다. 왼쪽 벽면처럼 이번 전시 곳곳에는 오스틴 리가 직접 그린 드로잉과 텍스트가 적혀 있는데,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고 느끼는 여러 감정과 아이디어를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기존 인류 역사에서 제작돼 온 이미지는 주로 유화, 수채화, 잉크 등 물질 재료를 사용했기에 과거의 우리는 CMYK(감산 혼합) 방식으로 구현된 색을 더 많이 경험해 왔습니다. 하지만 전기 기술이 발전한 시대를 사는 현재의 우리는 전기를 기반으로 디지털 신호가 구현하는 RGB(가산 혼합) 색을 더 많이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스틴은 이 RGB의 색감을 디지털이 아닌 현실 세계에서도 구현하는 작가입니다. 이는 단순히 레이저 프린터로 인쇄하는 것이 아닌, 채도 높은 아크릴 물감을 에어브러시를 이용해 분사하는 등 작가 본인이 직접 수작업을 통해 만들어 내는 이미지들입니다. 결국 디지털 내 결과물은 VR 스튜디오에서 디지털 기술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이를 아날로그로 옮긴 현실 세계에 작품은 현실에 어울리는 수작업 방식으로 제작하고 있는 것이 오스틴입니다.

 

▲ 튤립 스펙트럼, 2023, 캔버스에 아크릴

이 사진도 디지털 화면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에 직접 현장에서 육안으로 확인한다면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올 것.


다만, 막상 그의 작품을 미술관에서 마주하면 마치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거나 가상의 스튜디오 안에 접속해 들어와 있는 것처럼 현실성이 결여된 듯한 이미지를 만나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튤립 스펙트럼(Tulip Spectrum)>은 컴퓨터 그림판에서 장난치듯 그려 놓은 이미지처럼 보이지만 이 작품은 디지털로 작업한 이미지를 작가인 오스틴이 캔버스 위에 아크릴 물감을 분사해 직접 수작업으로 그린 작품입니다. 하지만, 직접 현장에서 육안으로 확인하지 않고 이렇게 디지털 화면이나 인쇄된 지류로만 봤을 때는 디지털 제작물처럼 보일 정도로 강한 색채를 띤다는 게 오스틴이 선보이는 21세기적인 색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스틴의 작품은 동시대적이고 힙한 인싸 감성을 갖고 있습니다. 
 

▲ 플라워 힐, 2023, 영상

전시 마지막 공간에 선보인 플라워 힐은 지나가는 시간에 대한 아쉬운 감정과 다가오는 새해의 설렘을 동시에 담은 작품이다. 세 개의 화면으로 이루어진 영상에는 눈, 코, 입이 있어 마치 인간과 같은 인상을 주는 꽃들이 언덕 위를 가득 메우며 조금은 수줍은 모습으로 익살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그의 작품은 가벼워 보이는 이미지 속에 진지한 메시지가 있고, 유머러스한 표현 속에 따뜻한 행복의 감정이 녹아 있습니다. 힘겨운 팬데믹 시대를 견뎌 온 현대인들이 잠시나마 디지털 세상에서 벗어나 현실의 시간을 살아가며 미소 짓고 위로받길 원하는 오스틴 리의 꿈이 담긴 전시, <오스틴 리 : 패싱 타임>이 지금 서울 롯데 뮤지엄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 전시에는 아시아 첫 개인전을 기념하기 위한 신작들을 많이 선보이고 있습니다.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 반짝이는 행복의 순간들을 오스틴이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더 다채롭게 만나볼 수 있으니 놓치지 말고 21세기와 가장 잘 어울리는 작가, 오스틴 리의 작품을 만나 보길 추천합니다.

 

 

필자 / 김찬용 도슨트
우리나라 1세대 전시해설가로서 16년간 80여 개 전시에서 해설하며 미술계의 타고난 이야기꾼으로 불려 왔다. 저서로 <김찬용의 아트 내비게이션>이 있으며, 이번 <오스틴 리 : 패싱타임> 전시의 도슨트를 맡았다.


※ 이 칼럼은 해당 필진의 개인적 소견이며 삼성디스플레이 뉴스룸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