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따르면 빛은 신의 첫 창조물이다. 하지만 유럽 사람들은 중세 암흑시대를 지나오며 신이 주신 빛이 가려진 어두운 그림에 익숙해져 있었다.


모네(Claude Monet, 1840~1926)는 <인상(해돋이)>에서 빛을 재발견했다. 얼마나 찬란한가! 빛이 뛰노는 환희를 보는 것 같다. 이른 아침 안갯속에 떠오르는 태양이 바다를 물들이는 장면은 화가의 눈에 매우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짧은 순간만 나타나는 이런 장면을 재빨리 잡아 그리기 위해 거칠고 짧은 붓질을 구사했는데, 이 기법은 인상주의의 전형적인 기법이 되었다.
 

 

찰나적 순간에서 대상의 본질을 꿰뚫다

 

▲ 모네, <인상(해돋이)>, 1873년, 캔버스에 유채, 48×63cm, 프랑스 파리 마르몽탕 미술관

 

인상주의 미술 사조는 그림을 잘 모르는 사람조차도 한 번은 들어봤을 정도인데, 바로 이 그림에서 유래했다. 그림 제목이 <인상(해돋이)>이기 때문이다. 모네를 중심으로 결성한 무명예술가협회의 첫 전시회 카탈로그를 인쇄할 때 모네가 원래 생각했던 ‘르아부르의 풍경’이라는 제목 대신 엉겁결에 ‘인상’(해돋이)이라고 말한 것이 그대로 제목이 됐고, 전시회를 본 『샤리바리』지의 루이 르루아(Louis Leroy) 기자가 “대상의 본질이 아니라 단지 인상만을 그렸다”라는 조롱의 의미로 그를 인상주의자라고 부르면서 ‘인상주의’라는 이름이 탄생했다.

 

모네는 1840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가족을 따라 노르망디 바닷가의 르아부르로 이주했는데, 이곳은 그가 평생 풍경화가, 특히 물의 화가로 살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르아부르에서 만난 외광주의(pleinairisme) 화가 부댕(Eugene Boudin, 1824~1898)도 모네가 화가의 꿈을 키우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모네는 공부보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1857년 그를 이해해 주던 어머니가 사망하자 학교를 자퇴했고 장사를 도와주길 원한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못해 방황했다. 그런 그를 혼자 살던 아마추어 화가인 고모 마리 잔이 데려갔다. 고모는 이후로 그가 화가로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가 열아홉 살이 되던 해 미술 공부를 위해 파리로 간 것도 고모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스물한 살 때 징집돼 아프리카에서 복무하다가 다음 해 장티푸스에 걸려 후송되었을 때도 고모 덕분에 군에서 제대할 수 있었다.

 

모네는 고모의 도움으로 글레이르(Marc Gabriel-Charles Gleyre, 1806~1874)의 화실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휘슬러, 르누아르, 바지유(Frédéric Bazille, 1841~1870), 시슬레(Alfred Sisley, 1839~1399) 등 후에 인상주의 운동을 함께할 평생의 동료들을 만나게 된다.

 

▲ 모네, <산책(파라솔을 든 여인)>, 1875년, 캔버스에 유채, 100×81cm, 워싱턴DC 국립 미술관

 

1867년 모네는 평생 그를 아껴준 고모와 애인 카미유, 그녀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 장과 바다가 있는 노르망디로 다시 내려가 마음의 안정을 얻고 많은 그림을 그렸다. 1871년 그는 파리 근교 센 강가의 아름다운 아르장퇴유에 정착했는데 <인상(해돋이)>뿐 아니라 최고 대표작인 <산책(파라솔을 든 여인)>도 이 시기에 그렸다. 이 그림은 인상주의의 특성과 미학이 아주 잘 표현된 걸작이다. 햇빛과 바람이 여인의 치마와 야생풀들을 어떻게 물들이는가를 정말 인상적으로 표현하였다. 모델은 그의 아내 카미유와 아들 장이다.

 

인상주의는 어떤 특정한 기법이나 화풍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기성 화단의 아카데미즘에 반대하여 나온 젊은 화가들의 운동이었다.

 

아카데미즘은 학교에서 잘 짜인 교육과정에 따라 드로잉·색채론·구도론·해부학 등을 배우고, 고전 주제에 대한 탐구와 고증을 바탕으로 잘 계획하여 제작한 작품을 공식 전시 행사인 국전(살롱)에 출품해 인정받는 제도권적인 화풍을 말한다. 그래서 국전 화파라고도 한다. 이 제도는 한번 정립되자 매우 튼튼하게 미술계를 장악했다. 기성 화가들은 자신을 존경하는 제자들을 가르칠 수 있는 보람이 있었고, 젊은 화가들은 스승의 도움과 학연에 의해 화단에 등단할 수 있는 데다 동료들과의 사교를 통해 여러 이득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카데미즘 화풍은 지나치게 정형화됨으로써 화가 개인의 개성과 감정의 표출을 억제하는 폐단을 초래했다. 더구나 이런 기준에 따르지 않는 젊은 화가들의 자유분방하고 실험적인 작품들이 국전에서 번번이 거부되자 이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다.

 

 

햇빛에서 다양한 색을 발견하다


마네를 중심으로 카페 게르부아에 모여 예술을 논하던 파리의 젊은 화가들 가운데 모네, 시슬레, 피사로 등은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을 피해 런던으로 건너갔다. 그들은 거기서 터너, 컨스터블 등의 풍경화를 보고 현란한 외광 표현에 감명을 받았다. 그들은 파리로 돌아온 뒤 야외로 이젤을 들고나갔다.

 

자연은 생각보다 훨씬 밝고 고정적이지 않고 계절과 날씨와 시간에 따라 유동적이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나무 잎사귀는 녹색이 아니라 은색이었다. 더구나 당시 뉴턴에 의해 프리즘에 의한 색의 스펙트럼 분할이 밝혀져, 물질은 본질적인 고유 색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빛에 의해 언제나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들은 이런 변화무쌍한 빛의 변화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산업혁명도 인상주의의 태동에 도움을 주었다. 산업혁명은 방직공업의 발전을 가져왔고 그에 따라 새로운 염료와 안료들이 속속 개발됐다. 1797년 프랑스의 니콜라 보클랭(Nicholas Louis Vauquelin, 1763~1829)이 크롬(chrome)을 처음 분리해 냈고, 1816년 보클랭의 제자인 쿠르츠가 크롬 안료 생산을 시작했다. 독일 화학자 슈트로마이어(Friedrich Stromeyer, 1776~1835)가 1817년 우연히 카드뮴(cadmium)을 발견한 다음 해에 프랑스의 장 앙리 주버(Jean Henri Zuber)가 카드뮴 옐로를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색이 대단히 아름다웠다.

 

천연 울트라마린은 아름답지만 너무나 비싸서 성모 마리아에게만 칠하게 했을 정도였는데, 1824년 프랑스의 장 바티스트 기메가 합성 울트라마린을 발명했다. 윌리엄 퍼킨(William Henry Perkin, 1838~1907)은 1853년 당시 왕립학교 학생이던 열다섯 살 때 아름다운 보라색 염료를 발명해 거부가 되었다. 안정된 좋은 색이 없던 녹색 문제도 1861년 빌헬름 폰 호프만(August Wilhelm von Hofmann, 1818~1892)이 발명한 알데히드 그린(aldehyde green)에 의해 해결됐다.

 

그야말로 봇물 터지듯 새로운 안료들이 쏟아져 나와 화가들의 손에 쥐어졌다. 튜브가 발명돼 간편하게 물감을 야외로 가지고 나갈 수 있게 된 것도 큰 동기가 됐다. 사진술이 발명돼 초상화를 중심으로 하던 미술계에는 변화가 불가피했는데, 초상화 시장을 빼앗은 사진이 그림에 피해만 준 것은 아니었다. 화가들은 순간을 포착하는 사진에 주목했고 그 영향으로 빛의 효과와 구도가 더욱 대담해졌다.

 

햇빛의 가시광선 영역을 프리즘으로 분할하면 6색(뉴턴이 색 체계를 7색으로 정리한 것은 그의 기독교적 신앙심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일주일은 7일이며, 음계도 7계이다)이 나타난다. 가시광선 영역은 파장이 가장 긴 빨강부터 가장 짧은 보라까지 양 끝을 연결해 원형을 만들면 6색 환, 즉 빨강-노랑-파랑의 3원색에 그 중간색이 포함된 빨강-주황-노랑-녹색-파랑-보라가 된다. 원색이란 다른 색을 섞어서 만들지 못하는 색을 말한다.
 

 

물감은 빨강-노랑-파랑을 혼합하면 색의 명도와 채도가 감소한다. 그래서 감산혼합이라 한다. 그러나 빛은 혼합하면 가산혼합이 된다. 빛의 3원색은 빨강-녹색-파랑인데 그들을 섞으면 명도가 증가하며 노랑(yellow)-시안(cyan)-마젠타(magenta)라는 중간색이 생긴다. 이 빛의 1차 중간색이 인쇄의 3원색이다.

 

중간혼합은 색을 섞으면 명도가 중간값을 갖는 것으로 병치혼합이나 회전혼합이 여기에 속한다. 예를 들어 팽이의 면에 두 색을 칠해 돌리는 것은 회전혼합이다.

 

물감의 색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색이 필요하면 원하는 색을 섞어 만들어야 하는데, 이 경우 명도와 채도가 떨어져 필연적으로 색이 어두워진다. 밝은색을 표현하고자 했던 인상주의 화가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병치혼합을 응용해 색을 섞지 않고 한정된 밝은색의 물감만으로 짧은 붓 터치를 했다. 빨강과 파랑의 작은 색점들을 모자이크처럼 교차해 병치시키면 사람이 멀리서 봤을 때 눈의 잔상 효과에 의해 보라색으로 보이게 된다.

 

붓 터치의 크기와 모양은 모두 다르지만 병치혼합을 응용한 것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공통된 기법이었다. 이 기법은 이후에 신 인상주의 화가인 쇠라와 시냐크에 의해 더욱 정교해지면서 좀 더 과학적으로 탐구되었다.
 

 

▲ 컨스터블, <오두막, 무지개, 방앗간>, 1837년, 캔버스에 유채, 87.6×111.8cm, 영국 리버풀 레이디 레버 아트 갤러리

 

인류가 햇빛에 색깔이 있다는 사실을 안 건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물체 운동 연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뉴턴은 햇빛을 분석하는 연구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햇빛이 여러 가지 색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당시로서는 믿기 어려운 연구 결과를 발표한 것이다. 

 

 

뉴턴은 1666년경 ‘프리즘’(prism)이라고 하는 유리 재질의 정삼각형 도구를 이용해 햇빛의 실체를 규명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프리즘으로 투영시킨 햇빛이 여러 색으로 나누어 퍼지는 현상을 목도했다. 그것은 분명 무지개였다. 태양의 반대편에 비가 오면 나타나던, 그때까지 어느 누구도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었던 영묘한 색띠가 바로 햇빛의 색깔이었던 것이다. 빛은 여러 색의 혼합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를 다시 하나로 합치면 흰색을 띤다는 과학 명제가 정립되는 순간이었다. 뉴턴은 빛이 파장의 세기에 따라 여러 색으로 나누어지는 현상을 ‘스펙트럼’(spectrum)이라 명명하고, 파장에 의해 빛을 분할하는 ‘분광법(spectroscopy)’이라는 새로운 과학적 기틀을 마련했다.

 

분광법은 과학의 여러 분야에서 응용되면서 학문적 발전을 거듭해 나갔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화학 안에서 분광법의 활약은 가히 독보적이라 할만하다. 분광법을 통해 분자의 구조와 크기가 속속들이 밝혀지기 시작했고, 알려지지 않은 광물 속 원소들의 실체가 하나둘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물체에서 방출하거나 흡수하는 빛을 통해서 그 물체를 구성하고 있는 원자와 분자를 규명해 나간다는 것은 과학사 전체를 놓고 볼 때도 매우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중심에 독일의 과학자 키르히호프(Gustav Robert Kirchhoff, 1824~1887)와 분젠(Robert Bunsen, 1811~1899)이 있었다. 두 사람은 금속염을 불꽃에 넣으면 금속의 종류에 따라 서로 다른 빛의 색이 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울러 금속 원소 스펙트럼과 햇빛 스펙트럼의 비교 분석을 통해 태양에 어떤 원소가 존재하는지도 규명해냈다.

 

훗날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에 의해 빛이 입자의 성질을 갖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분광법은 분자의 구조와 성질을 연구하는데도 한몫했다. 분자가 낮은 에너지 상태에서 높은 에너지 상태로 되려면, 에너지 준위의 차이만큼의 에너지를 흡수해야 한다. 반대로 높은 에너지 상태에서 낮은 에너지 상태가 될 때 그 에너지 차이만큼의 열이나 빛을 방출해야 한다.
 

 

 

필자 / 전창림(화학자) 전 홍익대학교 바이오화학공학과 교수

한양대학교 화학공학과와 동 대학원 산업공학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 파리 국립 대학교(Universite Piere et Marie Cuire)에서 고분자화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파리 시립 대학교에서 근무 후 귀국한 뒤 한국화학연구소에서 선임연구원, 홍익대학교 바이오화학공학과 교수로 재직 후 은퇴했다. 고분자화학과 색채학, 감성공학에 대한 많은 논문을 발표했으며, 지은 책으로는 『미술관에 간 화학자』 『그리기 전에 알아야 할 미술재료』 등이 있다.

 

 

 

※ 이 칼럼은 해당 필진의 개인적 소견이며 삼성디스플레이 뉴스룸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