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 T. S. 엘리엇 <황무지>
미국의 시인 T. S. 엘리엇의 시 ‘황무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각종 꽃이 만발한 봄은 생명력이 넘치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긴 겨울 동안 아늑한 땅 밑에서 안주하던 생명체에게는 깨어나라고 재촉하는 시기이기에 잔인할 수도 있다. 사람들, 특히 학생과 직장인 역시 4월이 잔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수업이나 회의 중에 밀려오는 졸음을 참지 못해 곤혹스럽기 때문이다. 물론 점심 먹고 나서 앉아 있다 보면 어느 계절에나 졸리기 마련이지만 봄철에는 시도 때도 없고 강도도 더 세다. 그래서인지 봄철에 피곤하고 졸린 현상을 가리켜 ‘춘곤증’이라 부르기도 한다. 엘리엇은 잔인하다고 말했지만, 아무튼 식물은 꽃을 피워낼 정도로 힘을 내는데 왜 사람은 봄에 오히려 나른해지는 걸까. 춘곤증의 원인을 크게 두 가지로 분석해 보자.
1. 영양 과잉의 시대, 영양부족으로 춘곤증이 온다고?
먼저 영양학적 관점으로 살펴볼 수 있다. 겨울 동안 위축돼 있던 몸의 신진대사가 봄을 맞아 활발해지면서 더 많은 비타민과 미네랄 등 영양소를 필요로 하지만, 제대로 공급되지 못하기 때문에 춘곤증이 발생할 수 있다.
특히 예전에는 ‘보릿고개’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봄에 먹을 게 부족했다. 이는 서양도 마찬가지. 춘곤증을 뜻하는 ‘spring fever’는 원래 겨울 저장 음식도 다 떨어진 봄에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거의 못 먹어 비타민C 결핍으로 나타나는 ‘괴혈병 증상’을 가리켰다.
오늘날은 영양과잉의 시대라지만 여전히 현대인들은 영양부족을 겪고 있다. 흰 밀가루나 백설탕 같은 정제된 재료로 만든 가공식품과 패스트푸드가 식탁을 점령하기 때문이다. ‘칼로리(열량)’로 환산할 수 있는 탄수화물, 지방 같은 대량영양소만이 넘칠 뿐 신진대사를 원활히 하는 데 꼭 필요한 비타민, 미네랄 등 미량영양소는 부족하다. 그 결과 각종 생체반응을 촉매하는 효소의 활성이 떨어진다. 늘 그래야겠지만 특히 봄철에는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꼭 챙겨 먹어야 하는 이유다.
2. 우리는 겨울보다 봄에 25분이나 덜 잔다!
봄에 자주 피곤하고 졸린 두 번째 이유는 밤에 충분히 잠을 자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면 부족 상태에서 깨어 있다 보니 오후에는 물론이고 어떨 때는 오전에도 꾸벅꾸벅 졸게 된다. 그런데 왜 봄에는 잠을 제대로 못 자게 되는 걸까. 이는 지구의 공전과 관련이 있다.
공처럼 생긴 지구는 자전축이 수직에서 23.5도 기운 채 공전하고 있다. 그 결과 계절에 따라 낮의 길이가 달라지는데 위도에 따라 그 정도가 다르다. 즉 적도에서는 낮이 1년 내내 변함없이 12시간이지만 위도가 높아질수록 겨울과 여름의 차이가 벌어진다. 중위도인 우리나라는 낮 길이가 가장 짧은 동지와 가장 긴 하지의 차이가 5시간 12분에 이른다. (서울 기준).
그런데 동지에서 하지에 이르는 반년 동안 낮이 일정하게 하루 1.7분씩 길어지는 건 아니다. 동지 직후에는 서서히 길어지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을 전후로 하루 2.5분으로 가속화되다가 다시 줄어 하지에 최소가 된다. 즉, 가을도 마찬가지겠지만 봄은 낮 길이가 가장 급격히 변화하는 시기다. 그네 타기에 비유하자면 뒤로 당겨 손을 놓은 순간이 동지이고 가장 아래에 왔을 때가 춘분, 앞으로 올라와 순간 멈췄을 때가 하지인 것이다.
이처럼 춘분을 전후해 낮의 길이가 급변하면서 신경계와 내분비계가 미처 적응하지 못하게 되고, 수면 호르몬인 멜라토닌의 분비량이 뚝 떨어진다. 여기에 춘분 이후 기온이 빠르게 오르며 교란을 더한다. 그 결과 봄에는 정신이 불안정해지는 경향이 커 조현병(정신분열증) 관련 질환이나 발작, 수면장애 등의 발병률이 올라가고 대신 겨울에 환자가 많은 우울증은 줄어든다.
지난 2021년 학술지 ‘디지털 의학’에는 미국인 216명을 대상으로 5만 회가 넘는 관찰을 통해 계절별 수면 패턴을 분석한 연구 결과가 실렸다. 알래스카를 빼면 미국의 위도는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분석 결과 겨울보다 봄에 수면 시간이 25분이나 더 짧게 나타났다. 그 외에 여름엔 겨울보다 12분 짧았고, 가을은 유의미한 차이가 없었다.
잠이 드는 시간과 깨는 시간을 분석하자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잠이 드는 시간대는 겨울, 봄, 여름을 지나며 별 차이가 없었지만, 깨는 시간은 봄, 특히 4월과 5월에 두드러지게 일렀다. 즉 봄에 덜 자는 건 늦게 잠들어서가 아니라 일찍 깼기 때문이다. 실제로 봄에는 보통 밤에 많이 분비되며 수면을 촉진하고 유지하는 호르몬인 멜라토닌의 농도가 떨어지는 시점이 당겨진다.
▲ 4, 5월에 가장 짧은 수면시간을 기록했으며, 가장 이른 시간에 기상한 것으로 확인됐다. (출처: Digital Medicine)
춘곤증 예방 키워드는, ‘모닝 커피’, ‘햇빛’, ‘운동’
봄철 수면 부족은 생활 습관에 따라 상황이 더 나빠질 수도 있고 완화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커피 같은 카페인 음료는 하루 중 마시는 시간대에 따라 효과가 다르다. 아침에 진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일과를 시작하면 낮 동안 활발하게 지내고 잠드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저녁이나 밤에 커피를 마시면 수면을 방해해 이튿날 춘곤증을 악화시킨다. 참고로 카페인의 반감기(체내 농도가 절반이 되는 데 걸리는 시간)는 5시간 내외다. 그 결과 아침과 점심 하루 두 잔을 마셨을 때보다 저녁에 한 잔만 마셨을 때 잠들기 직전 몸속 카페인이 더 많을 수 있다.
▲ 저녁이나 밤보다는 아침에 마시는 모닝커피가 춘곤증 예방에 훨씬 도움이 된다.
빛도 중요한 변수다. 낮에는 충분히 햇볕을 쬐고 밤에는 되도록 어둡게 지내는 게 수면에 도움이 된다. 특히 실내생활이 대부분인 직장인들은 낮에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적은 게 큰 문제다. ‘실내에도 햇빛이 드는데…’ 이런 생각을 한다면 우리 눈의 적응력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실제 밝기를 측정해 보면 맑은 날 야외의 밝기는 실내의 100배에 이른다. 또, 밤에 스마트폰처럼 빛이 나오는 디스플레이 기기의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
▲ 평일에 운동하기 힘들다면 점심시간을 이용해 산책을 해보는 건 어떨까. 운동도 되고 햇빛도 쬘 수 있어 일석이조니까.
운동 역시 춘곤증에서 벗어나는 좋은 방법이다. 다만 주중에는 따로 시간을 내기가 어려우므로 출퇴근 때 여유가 있다면 한두 정거장 앞에서 내려 걷거나 점심시간에 산책하는 습관을 들이면 좋다. 다만 저녁에는 강도가 높은 운동보다는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는 게 수면의 관점에서는 바람직하다.
코로나19로 지난 3년 동안 봄을 빼앗겨서인지 올봄에는 어느 때보다도 각종 행사가 다채롭게 열리고 있다. 주말에도 춘곤증을 핑계 대고 집안에만 있기에는 지나가는 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상큼한 딸기 한 접시를 먹고 문밖으로 나가서 가벼운 산책이라도 해보면 어떨까.
※ 이 칼럼은 해당 필진의 개인적 소견이며 삼성디스플레이 뉴스룸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