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은 인간의 본성과도 같다. 특별한 필기구가 없었던 시절부터 인류는 기록을 해왔다. 고대 인류는 날카로운 도구를 이용해 동굴 벽에 그림을 그렸고, 기원전 4000년과 2500년경에 이집트와 중국에서 잉크와 먹이 각각 발명된 뒤부터는 돌 뿐만 아니라 나무, 동물의 가죽, 종이 등 다양한 매체에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전기가 통하는 전도성 잉크까지 나왔다. 과학자들은 이 전도성 잉크를 이용해 기록을 넘어 전자기기와 잉크의 영역을 디스플레이까지 확장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전자 잉크와 전도성 잉크 무엇이 다를까?
먼저 전도성 잉크에 대해 명확히 알 필요가 있다. 전도성 잉크를 전자 잉크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전자 잉크는 전자책에 사용하는 잉크다. 액체 속 전기에 반응하는 검은색과 흰색(회색) 캡슐을 넣어 전기장의 방향에 따라 정렬이 달라지는 형태의 잉크다. 주로 전자책이나 일부 태블릿, 스마트폰의 디스플레이 용도로 사용한다.
▲전도성 잉크를 활용한 페인팅 (출처: Bare conductive 유튜브 채널)
반면 전도성 잉크는 말 그대로 잉크 자체에 전기가 통하는 것을 말한다. 은이나 구리처럼 전기 전도도가 높은 물질을 섞어서 만들며, 그림처럼 그려서 원하는 형태의 전기 회로를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전도성 잉크는 가격이 비싸고 내구성이 떨어지는 것이 단점으로 지적됐다. 은의 경우 가격이 비싸고, 구리는 공기에 노출되면 금세 산화되기 때문에 가격은 싸지만 쉽게 성능이 저하된다. 또 은보다 높은 온도에서 녹기 때문에 가공하기도 까다로웠다.
값싸고 튼튼해진 전도성 잉크
하지만 최근 이런 문제를 해결한 새로운 전도성 잉크가 속속 개발되고 있다. 한국전기연구원은 구리에 ‘그래핀’이라는 물질을 더하는 방식으로 기존의 단점을 해결한 전도성 잉크를 2018년에 개발했다. 그래핀은 2010년 노벨물리학상의 주인공을 탄생시킨 신소재로, 구리보다 전기가 100배 이상 잘 통하고 강철보다 200배 이상 강도가 세 ‘꿈의 신소재’로 불리는 물질이다.
▲한국 연구진이 개발한 구리–그래핀 복합 잉크 (출처: 한국전기연구원)
연구팀은 그래핀을 구리 표면에 합성하는 방법으로 전도성 잉크를 만들었다. 그 결과 전기 전도도가 높아졌고, 6개월 이상 구리가 산화되지 않았다. 또 높은 온도에서도 성능이 거의 떨어지지 않았다. 85℃ 온도와 85% 상대습도 환경에서도 6개월 동안 전기 전도도 변화가 5% 미만으로 적었다. 또 가격은 은보다 10분의 1 수준이어서 터치패널과 디스플레이 등을 낮은 가격으로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스프레이처럼 뿌려서 원하는 인터페이스를 만든다?
▲일상적인 물체에 전도성 잉크로 이루어진 페인트 스프레이를 뿌려 사용자 맞춤 인터페이스를 만드는 방법 (출처: MITCSAIL 유튜브 채널)
이처럼 전도성 잉크의 내구성이 높아지고 가격이 낮아지면서 다양한 응용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그 중 흥미로운 사례는 미국 메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 연구진이 제시한 ‘스프레이어블-테크(SprayableTech)’ 기술이다.
스프레이어블-테크 기술은 사용자가 원하는 물체 표면에 전도성 잉크를 뿌려 자유자재로 필요한 형태의 인터페이스를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면 벽에 스프레이를 뿌려서 전등을 조작하는 스위치를 만들거나, 소파에 스프레이를 뿌려서 TV 채널을 조작하는 리모컨을 만들 수 있다.
미술 시간에 해봤던 스텐실 기법을 생각하면 쉽다. 원하는 형태의 인터페이스를 스텐실 형태로 출력한 뒤 거기에 전도성 잉크가 들어 있는 스프레이를 뿌리고 스텐실을 제거하면 인쇄한 모양이 그려진다. 거기에 색을 입히고 입력과 출력을 담당하는 전기 회로 기판과 연결하면 완성된다. 연구진은 이 기술을 그래피티나 스마트 건축에 접목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 대표팀이 2018년 동계올림픽 입장식 때 입었던 단체복으로 전도성 잉크가 내부에 탑재돼 있어 온도를 조절할 수 있다. (출처: Butler Technologies Inc. 유튜브 채널)
잉크와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의류에도 전도성 잉크를 적용한 사례가 있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당시 미국 대표단이 착용한 단체복 재킷이다. 스스로 열을 발산해 몸을 따뜻하게 해 주는 이 재킷의 비결이 바로 전도성 잉크였다.
유연하고 신축성 있는 전도성 잉크를 이용해 미국 국기 모양을 출력해서 재킷 내부에 부착했고, 배터리와 간단한 회로를 달아서 설정된 온도에 맞게 열을 발산하게 했다. 한 번 충전하면 11시간 동안 옷을 따뜻하게 해 주며, 전용 애플리케이션으로 온도를 설정할 수 있다.
전도성 잉크와 ‘돌돌이 기법’으로 디스플레이 미세 회로까지
▲한국기계연구원 연구팀이 전도성 잉크로 고해상도 디스플레이 회로를 제작할 수 있도록 개발한 ‘돌돌이 기법’ (출처: YTN 뉴스)
전도성 잉크를 이용해 고해상도 디스플레이 회로를 만들 수 있는 제조기술도 나왔다. 한국기계연구원은 집에서 청소할 때 쓰는 ‘돌돌이’에서 착안한 기법을 2015년에 개발했다.
원리는 이렇다. 전도성 잉크를 균일하게 뿌려 코팅한 뒤 롤러로 코팅을 말아서 부착시킨다. 그런 뒤 원하는 패턴을 새긴 판 위에 롤러를 굴리면 필요 없는 패턴이 제거된 전도성 잉크 회로를 얻을 수 있다. 이 회로를 원하는 소재 위에 굴리면 회로가 떨어져 나오는 원리다.
2015년 당시 이 기술을 이용해 가장 얇게 만들 수 있는 디스플레이 회로의 선폭은 약 2㎛(마이크로미터·1㎛는 100만 분의 1m)였는데, 연구팀이 개발한 기술은 1㎛급 선폭을 가진 회로를 만들 수 있어 고해상도 디스플레이용 전자 회로를 제조할 수 있는 토대로 평가받았다. 특히 사람 눈에 보이는 최소한의 크기인 2~3㎛보다 작기 때문에 LCD나 OLED 디스플레이의 투명전극(ITO)을 저렴하게 대체하거나 터치패널을 투명하게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 스프레이어블 기술처럼 어디에나 찍어낼 수 있어서 사물인터넷(IoT) 센서 등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잉크가 발명된 지 6000년 이상 흐른 21세기. 인류는 잉크를 단순히 문자를 기록하는 것을 넘어 의류와 디스플레이로 확장하는 데까지 활용하고 있다. 전도성 잉크가 상용화된 일상은 어떤 모습일까? 또 어떤 상상하지 못했던 형태로 전도성 잉크가 활용될까? 과학자와 공학자들의 상상력을 기대해보자.
※ 이 칼럼은 해당 필진의 개인적 소견이며 삼성디스플레이 뉴스룸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