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환상이 사라진 놀이동산
2015년 8월 21일 영국 서머싯주 웨스턴슈퍼메어에 새로운 놀이공원 디즈멀랜드(Dismaland)가 오픈했습니다. 이 놀이동산은 현재 미술계에서 가장 큰 이슈들을 만드는 예술가 뱅크시가 기획해 완성한 공간으로 58명의 예술가가 함께 참여했습니다. 꿈과 환상의 놀이동산 디즈니랜드(Disneyland)에 음울함을 뜻하는 Dismal을 합성하여 디즈멀랜드(Dismaland)라고 이름 붙여진 만큼, 디즈멀랜드는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놀이동산과 달리 기괴하고 우울한 분위기를 풍겼습니다. 놀이동산 입장을 위해 지나쳐야 하는 검색대는 종이로 대충 그려서 만든 가짜 검색대로 만들어졌고, 이곳에서 검문당하는 것은 미키마우스, 유니콘 등 희망과 행운을 상징하는 물건들이었습니다. 운영자들의 지시에 맞춰 금지 물품을 내려놓고 놀이동산에 입장하면, 모든 희망과 행운이 상실된 듯 다 부서져 가는 허름한 고성과 위험해 보이고 투박한 놀이기구들로 가득한 기이한 풍경을 마주하게 됩니다. 뱅크시는 왜 이와 같은 음울한 놀이동산을 만들었던 걸까요?
<플로리다 프로젝트>라는 영화를 아시나요? 2017년 개봉한 이 영화는 디즈니월드 근처 빈민촌에 사는 6살 아이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꿈과 환상으로 포장돼 있지만 사실은 처절한 빈부격차 속에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의 모습과 그럼에도 해맑게 꿈을 꾸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줘 평단에서 호평받은 영화입니다. 아마도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 희망만을 걷어내고 우울한 현실만을 남긴다면, 뱅크시의 디즈멀랜드가 될 것입니다.
당시 뱅크시는 난민 문제, 극심한 빈부격차, 과도한 검열, 공권력 남용 등 우리 시대가 갖고 있는 여러 문제를 참여 작가들과 함께 풍자하고 비꼬는 방식으로 공간을 기획했는데요. 시각적으로만 봤을 땐 기괴하고 우울해 보이지만, 그 내부에 담긴 메시지와 철학을 보다 보면 우리 시대를 고민하고 반성하게 됩니다.
우리의 환상과 희망을 깨부수고 비참하고 우울한 현실을 보여주겠다는 이 놀이공원은 약 한 달간만 운영했음에도 15만 명의 관람객이 방문하는 등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운영이 끝난 디즈멀랜드의 건축자재들은 프랑스 칼레 난민 거주지를 짓는 데 재활용됐는데요. 우리 시대의 예술이 어떤 모습으로 영감을 주고 어떻게 세상에 기능할 수 있는지를 제시한 참신한 사례로 역사에 남게 됐습니다.
국내에 들어온 디즈멀랜드의 아이콘
전시 종료 후 디즈멀랜드에 설치된 거대한 고성은 분해돼 난민 거주지에 재활용됐지만, 작품으로 남은 조각이 있습니다. 놀이동산을 대표하는 아이콘, 디즈니 인어공주 <에리얼> 조각입니다. 에리얼 조각은 일반적인 모습과 달리 고장난 디지털 화면처럼 일그러진 형태로 제작됐습니다. 아름다움과 환상이 한낱 허상에 불과하다는 디즈멀랜드의 정체성을 한눈에 보여주는 작품이었는데요. 그 작품이 지금 국내에서 전시되고 있습니다.
올해 초 일본 도쿄에 위치한 모리 아트센터 갤러리에서는 독일 뮌헨의 MUCA(Museum of Urban and Contemporary Art) 소장품을 대여해, 동시대 거리에서 꽃피운 현대미술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특별한 전시가 열렸습니다. MUCA는 뱅크시의 작품뿐만 아니라 어반아트 즉 스트리트아트를 대표하는 수많은 예술가의 원작을 소장한 미술관으로 유명한데요. 많은 미술 애호가들에게 호평받았던 바로 그 전시가 지금 서울 충무아트센터 갤러리 신당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한국에서 최초로 선보이는 MUCA의 컬렉션으로, 도쿄 전시에서는 선보이지 않았던 뱅크시의 <훼손된 전화박스>와 인베이더의 <달>도 만나볼 수 있는데요. 특히 뱅크시의 <훼손된 전화박스>는 MUCA에서 세계 최초로 공개하는 작품입니다.
왜 지금, 어반아트에 주목해야 하는가
예술에는 여러 가지 목적과 서로 다른 가치 추구가 존재하기에, 하나의 예술 방식만이 절대적인 진리이자 정답이라고 이야기할 순 없습니다. 다만, 부의 양극화는 점점 심해지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사회적 문제 앞에서 이를 외면한 채 막연히 아름다운 기술만 연마하며 현실을 망각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예술입니다. 반대로 거리로 뛰쳐나와 발언하고 외치며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어반아트의 작품은 가장 동시대적인 예술 방식으로 평가받으며 미술계에서 주목받고 있습니다.
주로 밤거리에 나타나서 기습적으로 벽에 작품을 새기고 사라지는 그들의 작품이 고전 미술에 익숙한 이들에겐 다소 성의 없고 대충 만든 작품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회의 불합리한 시스템에 쉽게 타협하지 않고, 끊임없이 투쟁하는 모습에서 우리 역시 망각하고 있었던 현실에 대해 한 번쯤 고민하게 하는데요. 그들의 작품을 보면 현대의 미학은 단순히 시각적 아름다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개념과 행위 그 자체로도 누군가에게 영감을 주는 예술적 미학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혹은 인상주의 시대에 모네, 르누아르, 반 고흐 외 위대한 예술가들이 각자의 시대정신을 미술이라는 언어로 표현하였듯, 21세기의 시대정신은 <어반아트: 거리에서 미술관으로>에 소개된 예술가들이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실제로 앞서 소개한 영국의 뱅크시는 이미 현대 미술계 중심에 서 있다는 극찬을 받고 있습니다. ‘HOPE’라는 메시지가 새겨진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초상 포스터로 유명한 셰퍼드 페어리는 미국의 스타 예술가로 군림하고 있고, 프랑스의 뱅크시로 불리는 JR은 <여성은 영웅이다>와 같은 공공을 위한 거리 프로젝트를 통해 2011년 테드상을 받으며 세상을 바꾸는 희망의 예술가라는 별명을 갖게 됐습니다.
그 외에도 이번 전시에는 카우스, 인베이더, 빌스, 스운 외 총 10인의 어반 아티스트의 작품 70여 점을 만나볼 수 있는데요. ‘도대체 거리의 예술이 우리에게 어떤 영감을 줄 수 있는 걸까?’라는 궁금증이 있는 분들이라면 작품을 직접 보며 그 안에 내포된 메시지를 생각해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미술을 통해 현재 살고 있는 이 시대를 깊게 이해하기 위해선 현대 미술을 많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반아트는 가장 동시대에 가까운 예술 형태 중 하나인데요. 내년 2월 2일까지 진행될 이번 전시를 통해 미술적 취향을 확장하고 우리 시대를 사유해 보는 시간을 가져 보길 추천합니다.
우리나라 1세대 전시 해설가로서 16년간 80여 개 전시에서 해설하며 미술계의 타고난 이야기꾼으로 불려왔다. 저서로 <김찬용의 아트 내비게이션>이 있으며, 현재 다수의 전시 해설을 맡고 있다.
※ 이 칼럼은 해당 필진의 개인적 소견이며 삼성디스플레이 뉴스룸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