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 만난 디지털 정글
지난 4월, 2주간 영국을 일주하는 아트투어를 진행하기 위해 런던으로 향했습니다. 영국박물관, 내셔널 갤러리, 테이트 모던, 빅토리아&알버트 뮤지엄 외 수많은 미술관과 더불어 런던, 옥스퍼드, 브리스톨, 리버풀, 리즈, 요크 등 다양한 미술 명소를 마주한 시간이었지만,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공간은 런던의 서펜타인 노스 갤러리에서 만난 ‘레픽 아나돌’의 전시였습니다. AI 기술을 기반으로 예술을 선보인 레픽 아나돌 스튜디오 작업은 미술계에 큰 반향을 일으켜왔고, 작년 63빌딩 로비에 상설 전시물이 설치되면서 국내에서도 이슈가 되었기에 그의 최신작이 궁금했습니다.
당시에 이 전시는 5주라는 길지 않은 전시 기간 동안 65,000여 명의 관람객이 방문해 영국에서도 큰 이슈가 되며 흥행 중이었습니다. 이미 사전 예약은 다 매진돼 현장에서 기다림 끝에 들어선 전시장 입구에는 무언가 끊임없이 분석하는 듯한 디지털 화면이 재생되고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보게 될 작품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는 장면인데, 그 모습부터 일반적이지 않아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자연에 특화된 오픈소스 기반의 생성형 AI 모델인 ‘대규모 자연 모델(LNM)’에 대한 개발 과정과 배경을 소개하는 영상. 첨단 기법을 이용해 여러 우림 지역을 탐험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데이터의 수집 및 처리 과정을 알려준다.
작가는 작품을 위해 2년간 5억 개 이상의 식물, 동물, 풍경 등의 자연 이미지와 아마존 새소리 등 50만 개 이상의 방대한 사운드를 수집했고 1년간 이런 데이터들을 정제해 AI에게 학습시키는 숙고의 시간을 거쳤습니다. 인간에 의해 시작됐지만 AI가 이해하고 완성한 작품을 선보인 것입니다. 소개 글만 보면 미술보다 과학에 더 가깝게 느껴졌던 이 프로젝트의 결과물은 실로 경이로웠습니다.
서울에서 만나보는 레픽 아나돌의 첫 개인전
런던에서 새로운 시대의 예술을 선보였다며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 호평을 받은 이 전시가 더 진화한 모습으로 서울에 상륙했습니다. 종로에 새롭게 문을 연 푸투라 서울이 개관전시 작가로 레픽 아나돌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번 전시는 규모도 런던보다 크지만, 50만 개의 향기 분자를 분석해 ‘AI가 만든 향’까지 맡을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오감이 자극되는 다채로운 경험을 통해 자연을 복합적인 개념으로 해석한 AI 예술 작품을 만나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을 활용해 제작한 실감형 다중감각 예술 작품. 이 작품은 다중채널 사운드, 비디오, 후각 경험을 결합해 세계 각지의 우림을 생생하게 재현한 AI 시뮬레이션이다.
레픽 아나돌 스튜디오의 작품은 기존의 예술 개념을 무너트리고 넘나드는 작품을 선보입니다. 단순히 벽에 걸거나 단상에 올려놓는 회화나 조각이 아닌, 전시 공간 자체가 빛이라는 디지털 요소를 활용한 캔버스가 된 것입니다. 관람객들은 서서, 앉아서 혹은 누워서 이를 바라보며 감상이 아닌 경험의 영역에서 작품을 마주합니다.
수백만 장의 식물 이미지를 이용해 예술과 과학의 융합을 시도한 작품. AI 기술을 적용한 데이터 기반 그래픽들을 통해 이런 첨단 기술이 식물들의 종 다양성을 면밀히 기록하고 감상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긴 시간 누적되면서 수집된 정보는 픽셀의 입자가 되고, AI가 학습하여 조합한 디지털 픽셀들은 유기적인 형태로 조합됩니다. 액체와 같은 추상적 움직임을 보여주기도 하고, 꽃이나 풍경의 이미지를 재해석해 기존의 인류가 표현해 온 자연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미학적 감각을 선보이기도 합니다. 작품 스스로가 새로운 시대의 예술이 꽃 피고 있음을 증명하는 셈입니다.
4억 개가 넘는 동물 이미지와 대자연의 파노라마적 요소를 결합한 작품. 디지털 기술로 기록된 야생에 대한 기억을 획기적인 방식으로 재해석해 야생 보호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클로드 모네가 자연의 인상을 포착하고, 빈센트 반 고흐가 자연의 에너지를 표현하며, 데이비드 호크니가 자연의 환희를 담아내었듯, 레픽 아나돌은 자신 역시 자연을 사랑하고 이를 연구해 선보인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그는 이번 작품을 위해 브라질 아마존의 야와나와 부족과 약 2년간 함께 생활하며 자연을 직접 경험하고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마존은 ‘지구의 허파’가 아닌 ‘지구의 심장’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그의 경험과 가치관은 AI를 통해 해석됐습니다. 지구가 병들어가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자연을 어떻게 바라보고 지켜야 할지 한 번쯤 생각해보게 하는 오묘한 작품으로 탄생한 것입니다.
약 1억 개의 산호 이미지를 기초 데이터로 사용해 매혹적인 시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이 데이터 조각은 2023년 세계 경제 포럼(WEF)에서 처음 선보였다. 시뮬레이션 된 해양 서식지를 보여줌으로써, 시급한 환경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자 한다.
패러다임의 변화. AI가 만든 이미지는 예술이 될 수 있을까?
르네상스 시대 유화물감의 등장은 인류 미술사에 있어 혁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기존에 프레스코화에 익숙했던 예술가들에게 유분이 많아 잘 마르지 않는 유화는 낯설고 기괴한 재료였습니다. 그러나 얀 반 에이크를 필두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라파엘로 산치오 등 새로운 시대의 천재들이 이를 적극 활용하며 중세 시대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사실적인 회화의 길을 열었고, 이는 6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술사의 중심 재료로 군림하며 수많은 미술품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모름지기 미술 작품이라면 인간이 직접 물감을 칠하거나, 돌을 깎거나 혹은 철학적 개념이라도 활용하여 물질적인 매체로 만들어지는 것들이었는데, 현재 우리가 마주한 시대는 이 모든 관념이 무너지며 인간에 의한 것이라고 하기에도 모호한, 실재하지도 않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 속 AI가 남기는 결과물들을 인간의 예술로 혹은 창작물로 인정해야 할지에 대해선 미술계 내부에서도 여전히 의견이 분분한 상황입니다.
레픽 아나돌 스튜디오가 수집하고 큐레이션 한 약 1억 5,500만 개의 자연경관 이미지를 재료로 한 작품. AI가 상상하는 자연 풍경과 색의 향연을 그려낸다.
10여 년 전만 해도 A I기술은 먼 미래의 기술 같았고, SF 영화 속에서나 마주할 상상 속의 이야기처럼 인지되어 왔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AI의 시대가 다가왔음을 느끼게 한 사건은 아마도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대결이었을 것입니다. 이미 체스 대회를 평정하고 바둑에 도전을 시작한 알파고였지만, 체스와 비교해 무한한 경우의 수를 가진 바둑은 인간의 창의적 사고가 필요한 영역으로 여겨졌기에 AI의 기술이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치부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대국이 시작되자 세계에서 가장 창의적인 바둑을 둔다고 평가받는 이세돌이 압도당하며 연패를 하게 되었고, 바둑마저 기술에 제압당하는 모습은 모두에게 충격적인 인상을 남겼습니다. 힘든 상황 속에서 시작된 4국에서 이세돌은 AI의 계산 범위를 넘어선 신의 한 수로 1승을 했고, 유일하게 알파고에게 승리한 인간으로 기록되며 희망과 같은 존재로 역사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 끝에 더 이상 인간의 바둑은 AI의 바둑을 앞설 수 없음을 깨달은 이세돌은 은퇴했습니다.
서울 전역에 배치된 실시간 API 날씨 센서로 풍속, 방향, 돌풍 패턴, 온도 데이터를 수집해 유동적이고 역동적인 시각적 표현을 만들어냈다. 환경과 도시 사이의 상호작용을 독특한 방식으로 시각화한 이 작품은 보이지 않는 자연 패턴을 관객과 연결하고자 한다.
레픽 아나돌은 우리가 AI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인류는 늘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을 때 두려움을 먼저 느꼈고, 그것을 온전히 이해한 이후에는 수용하고 받아들이며 오히려 선호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AI를 이용한 예술을 통해 친근하게 변화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새로운 기술에 대한 두려움을 줄여주는 것이 예술가로서 자신의 역할이라고 말합니다. 누구도 확언할 수 없는 변화의 시대를 마주한 우리에게, 레픽 아나돌은 가장 긍정적인 시선과 상상력으로 AI를 사용하며 예술을 통한 사유를 유도합니다.
지난 5년 동안 태평양에서 수집한 풍속 예보 데이터를 AI 데이터 페인팅 시리즈로 변환한 작품.
이번 전시를 위해 내한한 레픽 아나돌은 인터뷰 말미에 우리에게 질문을 남겼습니다. “예술이 인간의 영혼을 치유할 수 있을까요?” 만약 전시장에 방문해서 경험하고 느낀 감정이 공포나 두려움이 아닌, 신비로움과 호기심이었다면 그의 말대로 AI를 통한 기술과 예술의 융합은 앞으로의 시대를 공존할 인류의 새로운 예술 방식으로 자리 잡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 과도기에 서있는 우리에게 레픽 아나돌의 작품을 직접 경험해 볼 기회가 코앞에 펼쳐져 있다는 건 애호가로서 너무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레픽 아나돌 스튜디오가 선보이는 이번 서울 전시는 12월 8일까지 진행된다고 하니, 미술계의 새로운 변화가 궁금하다면 직접 현장에서 느껴보길, 그리고 스스로 그 가능성과 미래를 예견해 보길 바랍니다.
우리나라 1세대 전시 해설가로서 16년간 80여 개 전시에서 해설하며 미술계의 타고난 이야기꾼으로 불려왔다. 저서로 <김찬용의 아트 내비게이션>이 있으며, 현재 다수의 전시 해설을 맡고 있다.
※ 이 칼럼은 해당 필진의 개인적 소견이며 삼성디스플레이 뉴스룸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