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대가의 대표 작품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이벤트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고 이를 통해 전시를 선보이는 방식 역시 다채로워지면서, 비록 원화는 아닐지언정 다양한 방식으로 유명 대가의 모든 대표작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종종 생겨나고 있습니다. 현재 그라운드시소 명동에서 진행 중인 <알폰스 무하 : 더 골든 에이지>는 그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 포스터 제공: 그라운드시소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듯 작가 삶의 궤적을 따라가며 작품을 소개하는 이번 전시는, ‘찬란했던 시절’이란 의미를 지닌 ‘벨 에포크’ 시대의 파리에서 시작됩니다. 이어 알폰스 무하를 스타로 만들어준 뮤즈인 사라 베르나르, 새로움과 화려함을 표방한 아르누보 예술 양식을 펼쳐간 그의 황금기와 조국을 위해 제작한 <슬라브 서사시>, 그리고 그의 대표작 <사계>까지 총 5개의 챕터가 50분의 영상 구성으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영상은 전시장 벽면과 바닥면 전체에 상영되면서 관람객이 무하의 작품을 보다 입체감 있게 감상할 수 있도록 미디어아트 형식으로 보여줍니다.

 

▲ 알폰스 무하의 대표작 <사계> 중 왼쪽부터 봄 [Spring], 여름[Summer]

 

▲ 알폰스 무하의 대표작 <사계>, 계절을 이보다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을까


 

현대 일러스트 아트의 선구자
 

▲ 벨 에포크 시기의 파리 거리를 입체감 있는 영상으로 재현해 관람객이 당시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표현했다.

 

1860년 모라비아(오늘날 체코 동부 지역)의 이반지체에서 태어난 알폰스 무하는 어려서부터 미술과 음악 등 예술에 특별한 재능과 호기심을 가진 아이였습니다. 무하의 어머니는 아들이 꿈을 키워갈 수 있도록 연필이 달린 목걸이를 선물해 언제든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가 재능을 타고나기도 했지만, 이를 알아보고 지지해 준 어머니의 영향을 크게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독실한 신자였던 어머니를 위해 유년기 성화를 많이 그리며 재능을 꽃피워 나가던 무하는, 그의 그림에 감탄한 쿠엔 벨라시 백작의 후원으로 독일 뮌헨을 거쳐 19세기 미술의 중심지 파리로 이주해 그림을 배워나가기 시작합니다. 이 당시 파리는 벨 에포크 시기, 즉 문화 예술이 가장 화려하게 진화하는 시대였습니다. 1889년 더 이상 벨라시 백작의 후원을 받지 못하게 되면서, 무하는 다양한 삽화를 제작하며 생계를 유지해갔습니다.

 

▲ 당시 파리 곳곳에는 예술가들의 포스터가 걸렸다. 그런 곳에서 알폰스 무하는 단 하나의 포스터로 단숨에 주목받았다.

 

그렇게 파리 생활에 익숙해져 가던 1894년, 무하는 인생을 뒤바꿀 기회를 만나게 됩니다. 당시 유명 여배우였던 사라 베르나르의 연극 포스터를 우연히 제작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휴가를 떠난 친구의 부탁으로 인쇄소에서 잠시 대신 일해주고 있었던 무하는 당장 마감일이 코앞인 사라 베르나르의 연극 <지스몽다>의 포스터를 그렸는데요. 이 포스터가 거리에 소개된 순간 파리는 열광했습니다. 당대 유명 삽화가였던 제롬 두세는 “무하는 <지스몽다> 포스터로 하룻밤 사이에 파리의 모든 시민이 무하의 이름을 기억하게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하니, 대중에게 그의 화려한 장식 스타일이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 지스몽다 포스터, 화려한 곡선미가 눈에 띈다.

 

▲ 알폰스 무하의 뮤즈, 배우 사라 베르나르

 

이를 통해 곡선적이고 화려한 장식과 아름다운 색채가 매력인 무하의 대표 스타일 아르누보가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순수미술이 아닌 상업미술계에서의 성공은 무하에게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더 고상하고 진중한, 역사에 남을 대작을 그는 꿈꾸게 됩니다.

 

 

18년간 완성한 국보급 대작

 

▲ 알폰스 무하는 파리에서의 명성을 뒤로 한 채, 자신의 조국 그리고 슬라브 민족의 투쟁과 업적에 대한 기념비인 <슬라브 서사시>를 제작하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무하는 1899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정부의 의뢰를 받고 작품 제작을 위해 발칸 반도를 여행하며 그들의 역사와 관습을 연구합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합병 지역에 머무르는 남부 슬라브인들의 생활을 목격했는데, 이 경험은 자신의 나라를 포함한 모든 슬라브 민족의 희로애락을 담아낸 <슬라브 서사시> 시리즈의 시발점이 됩니다. 20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이 시리즈는 고대부터 당대까지를 배경으로 하며, 10개의 체코 역사 이야기와 10개의 다른 슬라브 지방 역사적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본향의 슬라브인들>부터 <슬라브 찬가>까지

 

첫 번째로 완성된 <본향의 슬라브인들>로 시작해 마지막으로 선보인 <슬라브 민족의 역사 찬미>에 이르기까지, 준비 기간까지 합하면 총 18년의 시간을 투자한 대작이었습니다. 무하는 1928년 국가 독립 10주년 기념일에 맞춰 <슬라브 서사시> 전편을 프라하시에 선물했고, 이는 체코의 국보가 되어 현재까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 프라하에 가지 않아도 무하의 거대한 회화를 가까이서 만나볼 수 있게 미디어아트가 한 지평을 열어주었다.

 

시리즈 중 가장 큰 그림은 가로 8m 세로 6m에 이르는 작품이기에 <슬라브 서사시>는 특별한 이벤트가 없는 한 프라하에 가야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디지털 기술이 발전한 만큼  또 다른 가능성을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미디어아트라는 새로운 장르를 통해서라면 무하가 인생을 바쳐 제작한 거대한 회화들을 가까운 곳에서 만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이번 <알폰스 무하 : 더 골든 에이지>는 그러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전시이기도 합니다.

 

 

국내 미디어아트의 현재
 

▲ 알폰스 무하만의 아름답고 화려한 미디어아트가 장관을 이룬다.

 

50분의 상영 시간 중 35분은 알폰소 무하의 연대기입니다.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상세한 내레이션과 그의 인생 전반에 걸친 모든 작품들을 하나하나 선보이는데요. 영상에 몰입하다 보면, 무하가 낯선 이들도 그의 시대와 삶, 그의 예술이 왜 위대한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후반부 15분은 무하의 세계와 더불어 미디어아트의 매력을 만끽하는 시간입니다. 15분간 전시실 전면엔 그의 작품을 미디어아트로 해석한 현대의 아르누보가 화려하게 수놓아진 장관이 펼쳐지는데요. 덕분에 관람객은 추억과 기념, 감상을 넘어 경험의 영역에 들어선 21세기 미술의 전시 형식을 마음껏 느낄 수 있습니다.
 

▲ 전시 공간 전체를 거대한 스크린으로 활용해 작품의 몰입감을 높였다.

 

혹자는 미디어아트는 오리지널이 아니기에 작품이라 할 수 없으며, 대중적으로 기획된 미디어아트 전시는 질이 떨어진다고 평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기획과 대중에게 다가서기 위한 전시업계의 다양한 시도는 분명 의미가 있습니다. 이번 전시처럼 대가들의 작품을 디지털 방식으로 선행 경험한다면, 후에 원화 작품을 만났을 때 더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거리상의 한계로 원화를 보기 어려운 관람객은 원화를 생생하게 재현한 미디어아트를 통해 큰 감동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이번 전시처럼 대가의 작품을 한 번에 볼 수 있다는 건 관람객에게 큰 선물입니다. 최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레이크스 뮤지엄에선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로 유명한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작품 28점이 한자리에 모인 특별전이 열렸는데, 티켓 45만 장이 예매 오픈 이틀 만에 완판되며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한 대가의 작품을 한데 모은 전시는 그 자체로 큰 화제가 되곤 합니다.

 

▲ 알폰스 무하 <꽃의 언어>

 

▲ 알폰스 무하가 제작했던 잡지 표지와 전시회 포스터들


미디어아트는 이러한 전시를 만날 수 있는 좋은 방법 중 하나입니다. 동시대 회화의 거장 데이비드 호크니가 직접 디자인에 참여한 미디어아트 공간 < Light Room >은 애호가들에게 큰 호평을 받으며 런던의 명소로 자리 잡은 바 있습니다. 물론 국내 미디어아트는 아직 발전과 연구를 거듭해나가는 중입니다. 국내 미디어아트 전시의 현재와 그 가능성을 경험해 보고 싶다면, <알폰스 무하 : 더 골든 에이지>展에 한 번쯤 방문해 보길 추천합니다.

 

 

필자 / 김찬용 도슨트

우리나라 1세대 전시 해설가로서, 16년간 80여 개 전시에서 해설하며 미술계의 타고난 이야기꾼으로 불려왔다. 저서로 <김찬용의 아트 내비게이션>이 있으며, 현재 <데이비드 호크니 & 브리티시 팝아트>展의 전시 해설을 맡고 있다.

 

 

 

※ 이 칼럼은 해당 필진의 개인적 소견이며 삼성디스플레이 뉴스룸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