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4월 타임지에는 ‘LONDON : The Swinging City’라는 제목으로, 변화하는 런던의 문화를 소개하는 칼럼이 게재됐습니다. 비틀스와 롤링스톤즈가 세상의 중심에 선 새로운 시대, 런던의 젊은이들은 더이상 보수적인 문화에 갇혀 있지 않고 역동적이며 활기찬 에너지를 내뿜으며 살아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꽤나 많은 이가 팝아트는 미국 뉴욕에서 시작됐다고 오해하지만, 사실 팝아트는 1950년대 영국 런던에서 시작됐다는 게 정설입니다. 현재 동대문 DDP에서 진행 중인 <데이비드 호크니 & 브리티시 팝아트> 展은 동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 데이비드 호크니와 더불어 에두아르도 파올리치, 리처드 해밀턴, 브리짓 라일리, 피터 블레이크 등 15인의 브리티시 팝 아티스트의 다양한 예술 연구를 소개하며, 팝아트의 탄생과 진화 그리고 그 현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팝아트의 태동을 이끈 리처드 해밀턴
 

▲ 팝아트의 아버지라 불리는 리처드 해밀턴의 작품들

 

1950년대 영국의 젊은 예술가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적 공황에 빠진 영국과 달리 거대한 자본국으로 발전해가는 미국을 주시했습니다. 당시 미국의 산업과 문화가 영국에 미치는 영향을 예술로 표현한 것입니다. 리처드 해밀턴의 초기작 <무엇이 오늘날의 가정을 이토록 색다르고 매력적으로 만드는가?>라는 작품엔 이러한 영국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잘 담겨 있는데요. 이 작품이 1956년 <이것이 내일이다>展에 전시되며 팝아트라는 용어가 미술사에 처음 등장했습니다.

 

▲ 리처드 해밀턴의 초기작들 <무엇이 오늘날의 가정을 이토록 색다르고 매력적으로 만드는가?> (오른쪽)  작품 크게 보기

 

팝아트의 시작점이 된 이 해밀턴의 작품은 근육질의 남성, 성적 매력을 드러내는 여성, 포드 자동차 로고와 막대사탕, 녹음기, 진공청소기 등 미국을 상징하는 이미지들로 가득합니다. 한편 작품 속 오른쪽 벽엔 이 모두를 관망하는 고전적 초상화가 붙어 있습니다. 미국이 자본을 통해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보수적 자세로 과거에 머물러 있는 영국을 은유적으로 드러낸 겁니다. 결국 이 작품은 영국의 예술가에 의해 만들어졌음에도, 온통 미국의 상징들로 가득차 있는 모습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줍니다.
 

 

 

팝아트의 선구자, 에두아르도 파올리치
 

▲ 에두아르도 파올리치의 대표작 <많은 그림, 많은 재미> (왼쪽에서 두 번째)를 관람하는 관객들

 

현재 브리티시 팝아트로 정의되고 있는 작품들은 당시 ‘인디펜던트 그룹’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선보였습니다. 현재의 우리가 가볍게 감상하는 팝아트와는 달리, 당시엔 훨씬 개념적이고 실험적인 지적 미술 운동으로 시작됐는데요. 인디펜던트 그룹 즉 브리티시 팝 아티스트들은 20세기 대중문화의 이미지를 이용하고 다양한 매체 및 기술을 실험하며 현대적 예술을 추구한다는 공통점을 가졌습니다. 그와 동시에 시대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그 표현법에 있어서는 각자의 차이가 존재했습니다. 그 유명한 인상파 그룹도 시대와 빛의 인상을 추구한다는 공통점을 지녔지만, 마네와 모네, 드가와 르누아르가 인간과 풍경, 진지함과 가벼움이라는 서로 다른 접근법을 보인 것처럼 말입니다.
 

▲ 벽면에도 크게 전시되어 있는 에두아르도 파올리치의 <많은 그림, 많은 재미>

 

예를 들어 앞서 해밀턴의 작품과 달리, 에두아르도 파올리치의 <많은 그림, 많은 재미>라는 작품엔 우리가 잘 아는 팝아트적 느낌들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작품 속 성조기를 그리고 있는 코끼리는 캠벨 수프 깡통을 붓 통으로 사용하며 스팸을 코에 들고 있는데요. 여기서 등장하는 성조기, 캠벨 수프, 스팸은 각각 미국의 팝아티스트 재스퍼 존스, 앤디 워홀, 에드 루샤를 상징합니다. 그런가 하면, 코끼리와 강아지에 채색된 색감엔 또 다른 미국의 팝 아티스트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벤데이 점(Benday Dot)' 인쇄술(색을 점으로 분할해 찍어내는 인쇄 기법)이 적용됐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 작품에는 당대 미국을 대표하는 팝 아티스트의 상징들이 은유적으로 상당수 담겨 있는 셈입니다. 이는 마치 지금의 우리가 팝아트를 미국의 미술로 인지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팝아트의 원조가 영국임에도 더 큰 자본과 규모로 그 중심에 선 미국을 매머드같은 코끼리와 강아지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으니까요.


다만 <많은 그림, 많은 재미>라는 제목과 작품 속 강아지의 표정에서 예측할 수 있듯, 작가 파올리치는 이 상황을 재미있게 바라보고 있는 모양입니다. 각 국가의 다양한 예술가가 시대에 반응하며 새로운 실험을 선보이고 있는 현상을 말입니다. 이는 확실히 해밀턴이 바라보는 시대의 풍경과는 분명 다른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팝아트의 과거이자 현재와 미래, 데이비드 호크니


이러한 변화의 시대에 이번 전시의 메인 작가가 태어납니다. 영국 브래드퍼드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런던 왕립예술학교를 거쳐 미술계에 입문한 데이비드 호크니입니다. 변화하는 영국과 자유로운 미국을 모두 경험한 호크니는 수영장 시리즈로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 한국에서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호크니의 수영장 시리즈

 

한국에서 살아온 대다수의 우리가 그러하듯, 영국에서 보낸 호크니의 유년기 기억 속 수영장의 이미지는 모두가 함께 사용하는 공공 수영장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 방문해 호크니가 목격한 건 집마다 딸린 개인 수영장이었고, 이에 매료된 호크니는 비버리힐즈에 집까지 구했습니다. 마치 과거의 모네가 지베르니 정원의 수련에 빠져들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호크니는 인공 수조에 고여 희미한 바람에 흔들리는 물결의 모습에서 시적 감각을 느꼈습니다. 또 이를 회화, 사진, 판화 외 다양한 매체로 연구하며 작품으로 선보였죠.
 

▲ 호크니의 미디어아트 공간 ‘Light Room’을 오마주한 미러룸을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올해 2월 런던에 문을 연 전시장 ‘Light Room’은 호크니가 직접 디자인에 참여한 미디어아트 공간으로, 마치 관람객이 호크니의 작품 속에 들어간 듯 감상의 영역을 넘어 경험을 이끌어내는데요. 이번 <데이비드 호크니 & 브리티시 팝아트> 展에도 이를 오마주한 미러룸 전시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데이비드 호크니의 디지털 드로잉 <태양 혹은 죽음을 오랫동안 볼 수 없음을 기억하라>(가장 오른쪽)는 서울 코엑스 광장 전광판에 한 달간 상영되기도 했다.

 

실제로 호크니를 비롯한 브리티시 팝 아티스트들은 인쇄술과 더불어 이미지 복제와 확산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과거 예술가들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오리지널 작품을 통해 소수만이 가질 수 있는 예술 작품을 선보였던 것과는 무척 다른 부분입니다. 팝 아티스트들은 상업 미술계 및 디자인, 인쇄 및 디지털 기술에 관심을 가지며, 좀 더 많은 이가 일상에 예술이 스며들 수 있기를 꿈꾸었던 겁니다. 한창 팬데믹의 장기화로 힘겨웠던 2021년 5월, 데이비드 호크니가 런던, 뉴욕, LA, 도쿄, 서울에 미디어아트로 제작한 <태양 혹은 죽음을 오랫동안 볼 수 없음을 기억하라>를 선보였던 것도 같은 이유였습니다. 건강한 일상이 곧 돌아올 것을 기원한 이 작품은, 서울 코엑스 광장의 전광판에 한 달간 매일 저녁 무료로 상영됐는데요. 덕분에 시민들은 잠시나마 바쁜 일상을 멈추고 하루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일상의 예술로 스며든 팝아트

 

▲ ”영화, 공상 과학, 광고, 대중음악… 우리는 대부분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상업 문화에 대한 거부감을 전혀 느끼지 않고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자세히 토론하며 열광적으로 소비했습니다. 그 결과… 대중문화를 도피, 오락, 휴식의 영역에서 벗어나 예술의 진지함으로 대하게 됐습니다.” - 작가이자 이론가, 로렌스 앨러웨이

 

 

 

이처럼 팝아트는 이미 우리 일상에 들어와 있습니다. <데이비드 호크니 & 브리티시 팝아트> 展은 그 과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한 판화, 인쇄물, 기록물들로 구성했습니다. 팝아트가 선보이는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지금 동대문 DDP에서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길 권합니다.
 

 

 

필자 / 김찬용 도슨트

우리나라 1세대 전시 해설가로서, 16년간 80여 개 전시에서 해설하며 미술계의 타고난 이야기꾼으로 불려왔다. 저서로 <김찬용의 아트 내비게이션>이 있으며, 현재 <데이비드 호크니 & 브리티시 팝아트>展의 전시 해설을 맡고 있다.

 

 

 

※ 이 칼럼은 해당 필진의 개인적 소견이며 삼성디스플레이 뉴스룸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