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 잎이 시들기 시작했다고?
2018년 5월 말로 기억한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의 보도를 인용해 국내 언론사를 통해 나온 기사를 인터넷 포털에서 읽고 필자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결국 터질 게 터지고 말았구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전시된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의 <해바라기>가 노란색에서 갈색으로 변색되고 있다는 기사였다. 그림에 관심 없는 사람들은 시큰둥할 소식이지만 필자에게는 꽤 충격적인 뉴스가 아닐 수 없었다.
「가디언」의 보도에 따르면, 네덜란드와 벨기에 과학자들은 수년에 걸쳐 엑스레이 장비를 이용해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에 전시된 1889년 작 <해바라기>를 관찰해왔다. 그 결과 그림 속 노란색 꽃잎과 줄기가 올리브 갈색으로 변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과학자들은 변색의 원인으로 고흐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 밝은 노란색을 얻기 위해 크롬 옐로와 황산염의 흰색을 섞어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고흐가 크롬 성분이 들어있는 노란색 물감을 다량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고흐는 노란색 계통의 물감을 즐겨 썼고 그중에서도 크롬 옐로(Chrome Yellow)를 많이 사용했다. 크롬 옐로는 납을 질산 또는 아세트산에 용해하고, 중크롬산나트륨(또는 나트륨) 수용액을 가하면 침전되어 생성된다. 다시 이 반응에 황산납 등의 첨가물을 가하거나 pH를 변화시키면 담황색에서 적갈색에 걸친 색조가 생긴다.
크롬 옐로는 값이 싸서 고흐처럼 가난한 화가들이 애용했다. 하지만 납 성분을 함유하고 있어서 대기오염 중 포함된 황과 만나면 황화납(PbS)이 되는데 이것이 검은색이다. 그러므로 현대 산업사회로 접어들수록 변색의 우려가 크다. 특히 오랜 시간 빛에 노출되면 그 반응이 촉진되는 문제가 있다.
이미 수년 전부터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아온 미술관 측은 200개의 회화와 400개의 소묘 등 보유 작품들을 최상의 상태로 관리하기 위해 전시실의 조도를 재정비했다. 하지만 조도 상태를 손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해바라기>의 변색은 당장 육안으로 식별될 정도로 심각한 건 아니지만, 아무런 조치 없이 그대로 둘 경우 머지않아 갈색 해바라기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번 연구를 담당해온 벨기에 앤트워프 대학교 소속 미술 재료 전문가인 프레데릭 반메이르트(Frederik Vanmeert) 박사는 “변색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데 시간이 얼마나 소요될지 구체적으로 말하기 어려운데, 그 이유는 변색이 외부 요인들에 달려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해바라기>에 사용된 크롬 옐로가 대기 환경과 외부 조명에 대단히 취약하다는 얘기다.
과학자들은 <해바라기> 전체가 변색의 위험이 있는 게 아니라고 분석했다. 흰색을 섞어 밝게 만든 노란색 부분이 특히 변색이 심했고, 나머지 부분은 그나마 변색 가능성이 적다고 보았다. 고흐가 많이 사용한 크롬 옐로는 붉은빛이 돌면서 따뜻한 느낌을 주는 노란색으로, 노랑 계통 중에서도 색이 곱고 은폐력(隱蔽力)이 뛰어나다. 이런 이유로 고흐는 그림에서 핵심에 해당하는 해바라기 꽃에 이글거리는 태양빛과 가장 유사한 크롬 옐로를 집중해서 사용한 게 아닐까 싶다.
여행을 금지당한 <해바라기>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의 <해바라기>가 노란색에서 갈색으로 변색되고 있다는 뉴스가 나오고 몇 달 뒤인 2019년 1월경 다시 한번 이에 관한 외신이 전파를 탔다. 영국 일간지 「텔레그라프」는 반 고흐 미술관 측이 <해바라기>를 변색 위험을 이유로 당분간 해외 전시를 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내놨다고 보도했다.
반 고흐 미술관은 <해바라기>가 지금 당장은 작품 상태가 크게 문제 될 게 없지만, 앞으로 해외 전시를 위한 이동으로 인해 변색될 위험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악셀 뤼거(Axel Ruger) 반 고흐 미술관장은 “<해바라기> 그림의 물감 상태가 진동과 습도 및 기온 변화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라고 밝혔다. 따라서 “<해바라기>가 변색될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당분간 해외 전시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반 고흐 미술관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해바라기>의 변색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붉은색 물감(제라늄 레이크)이 희미해지고 노란색 물감(크롬 옐로)이 어두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2018년 5월에는 크롬 옐로의 변색을 발표했는데, 여기에 붉은색 부분의 변색까지 더해진 것이다. 고흐는 해바라기 꽃의 중심부를 붉은색 계통 물감으로 칠했는데, 이 부분이 희미하게 변색되고 있다는 얘기다.
빨간색은 레이크(lake) 안료가 많은데, 염료로 만든 안료라서 내광성이 약하다. 레이크 안료란 무색투명한 무기안료를 염료로 염색해서 만든 것으로, 제라늄 레이크(Geranium Lake), 스칼렛 레이크(Scarlet Lake), 크림슨 레이크(Crimson Lake) 등이 있다. 레이크 안료를 고흐도 애용했기 때문에 <해바라기>에 퇴색이 일어난 것으로 추측된다.
아울러 반 고흐 미술관은 <해바라기> 그림 위에 여러 겹 덧입혀진 광택제와 왁스의 색도 영향을 주었다고 밝혔다. 이는 고흐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림 표면에 덧입힌 것인데, 희끄무레해진 왁스는 제거할 수 있지만 광택제는 물감과 섞여 있어서 제거가 불가능하다.
반 고흐 미술관은 고흐의 그림 중에서 크롬 옐로 물감을 쓴 다른 작품들도 변색의 위험이 클 것으로 추정했다. 고흐는 ‘태양의 화가’로 불릴 만큼 노란색에 집착했다. <해바라기> 시리즈 말고도 <씨 뿌리는 사람>, <노란 집>, <밤의 카페 테라스> 등에서도 노란색이 돋보인다.
고흐가 노란색 물감에 집착한 것을 두고 일각에서는 고흐가 압생트(Absinthe)란 독주를 너무 과하게 마셔 주변 사물이 노랗게 변하는 황시증(黃視症)에 걸렸기 때문이라는 견해를 내기도 했다. 압생트에 함유된 투존(Thujone)이라는 테르펜 성분이 신경에 영향을 미쳐 환각 증세를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후대의 연구에 따르면, 압생트에는 환각 성분이 들어있지 않음이 밝혀졌다. 단지 도수가 70도 정도로 높은데, 여기에 각설탕을 넣어 마시는 음용법 때문에 자주 과도하게 마시게 되어 알코올 중독에 빠질 위험이 높은 것이다.
결국 고흐가 노란색을 즐겨 썼던 이유는 죽기 전 불꽃같은 예술혼을 태웠던 남프랑스의 강렬한 태양이 노랗게 이글거렸기 때문이다. 고흐는 화실로 사용하던 집도 노랗게 칠할 정도로 밝은 태양빛에 집착했다. 이런 그에게 해바라기(Sun Flower)는 이름 그대로 태양의 꽃이었다. 고흐에게 해바라기를 그린다는 것은 곧 태양을 그리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파리의 해바라기와 아를의 해바라기가 다른 이유
고흐는 프랑스 남서부 아를 지방에 머물며 일곱 점의 <해바라기>를 남겼다. 그는 아를에 오기 전 파리에 머물 때도 <해바라기>를 여러 점 그렸다. 하지만 파리에서 그린 <해바라기>는 아를의 것과 다르다.
파리에서 그린 <해바라기>는 아를의 것처럼 화병에 여러 송이가 꽂혀 있는 게 아니라 바닥에 두세 송이가 놓여 있다. 그것도 아를에서 그린 <해바라기>처럼 활짝 피어있지 않다. 그림의 전체적인 색상도 아를의 <해바라기>에 비해 어둡고 칙칙하다.
파리에서 그린 <해바라기>와 아를에서 그린 <해바라기>를 비교해 보면, 두 지역의 날씨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림 속 해바라기의 개화(開花)와 색상을 통해 파리에 비해 아를의 태양이 훨씬 밝고 이글거림을 알 수 있다. 야외의 자연환경에 따라 고흐의 그림이 엄청난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고흐가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임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우) 고흐, <해바라기>, 1888년(아를), 캔버스에 유채, 92.1x73cm, 내셔널 갤러리, 영국 런던
아를에서 그린 일곱 점의 <해바라기> 가운데 대중에게 공개된 작품은 다섯 점이다.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을 비롯해 런던 내셔널 갤러리, 뮌헨 노이에 피나코테크, 도쿄 손보재팬 미술관,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각각 한점씩 전시하고 있다. 나머지 두 점 중 하나는 개인이 소장하고 있고, 다른 한 점은 오사카에 있다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소실됐다.
고흐의 <해바라기>를 한곳에 모아 전시하는 상상을 해본다. 그래서 필자는 이 글에 제2차 세계대전에 소실된 <해바라기>까지 합쳐 <해바라기> 전시회를 열었다.
한양대학교 화학공학과와 동 대학원 산업공학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 파리 국립 대학교(Universite Piere et Marie Cuire)에서 고분자화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파리 시립 대학교에서 근무 후 귀국한 뒤 한국화학연구소에서 선임연구원, 홍익대학교 바이오화학공학과 교수로 재직 후 은퇴했다. 고분자화학과 색채학, 감성공학에 대한 많은 논문을 발표했으며, 지은 책으로는 『미술관에 간 화학자』 『그리기 전에 알아야 할 미술재료』 등이 있다.
※ 이 칼럼은 해당 필진의 개인적 소견이며 삼성디스플레이 뉴스룸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