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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3일은 세계 왼손잡이의 날입니다. 이날은 1992년 국제왼손잡이협회가 왼손 사용의 편견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왼손잡이의 인권을 신장하기 위해 제정한 날인데요. 왼손잡이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과 근거 없는 미신을 타파하는 날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사실 과학의 역사, 기술 발전의 과정도 기존의 잘못된 선입견을 깨뜨리며 만들어낸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왼손잡이의 날을 맞아 잘못된 편견이나 근거 없는 오해와 싸우며 끊임없이 전진해온 과학과 기술의 이야기를 담아 봤습니다.

노벨상의 권위에 반기를 든 과학자, 레이첼 카슨

▲ DDT를 발명한 파울 헤르만 뮐러(Paul Hermann Muller)와 DDT의 분자구조

1948년 발명된 DDT는 해충을 박멸하고, 농작물의 수확량을 늘렸으며 열대 지방의 말라리아 모기를 박멸해 수많은 인명을 구한 꿈의 살충제였습니다. DDT는 1940년대 말라리아에 시달리던 5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을 구한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하지만 1962년 해양 생물학자 레이첼 카슨(Rachel Louise Carson, 1907년 ~ 1964년)은 ‘침묵의 봄’이라는 책을 통해 DDT가 곤충은 물론 새들의 몸에도 축적돼, 개체 수가 줄어들고 있다고 지적하고 나섰습니다.

DDT 때문에 새들이 지저귀지 않는 침묵의 봄이 도래했다는 그녀의 주장에 화학 산업 전체는 물론이고, DDT 덕분에 수확량이 크게 늘어난 농가, 말라리아로부터 자유로워진 열대 국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이들이 반기를 들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DDT를 발명한 파울 헤르만 뮐러(Paul Hermann Muller, 1899년 ~ 1965년)는 수많은 인명을 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상태였습니다.

대부분의 과학자들 역시 인류를 구한 DDT를 금지시키면 질병과 해충이 창궐하는 암흑시대로 돌아갈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하지만 과학자들과 달리 일반 시민들은 카슨의 목소리에 주목했는데요. 이후 이 책은 환경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음은 물론, 정부의 환경 규제 정책을 이끌어 내는 기념비적인 저작이 되었습니다.

▲ 해양 생물학자 레이첼 카슨(Rachel Louise Carson)과 책 <침묵의 봄>

실제로 카슨은 ‘침묵의 봄’을 출간할 때 온갖 고소, 고발을 예상하고 ‘팩트 체크’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고 하는데요. 지금은 후속 연구를 통해 DDT의 폐해에 대해 많은 부분이 밝혀졌지만, 당시 인류를 구한 꿈의 살충제로 불리던 DDT의 독성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를 내기까지 카슨에게는 과학적 발견 이상의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다고 합니다.

비전공자의 ‘어그로’로 치부된 발견, 베게너의 대륙이동설

알프레트 베게너(Alfred Lothar Wegener. 1880년~1930년)는 독일의 기상학자이자 탐험가였습니다. 베를린과 하이델베르크, 인스부르크 등 여러 도시의 대학에서 물리학, 기상학, 천문학을 공부했습니다. 기상학에 관심이 많았던 베게너는 린덴버그 항공전망대에서 일하며 기구를 이용한 기상관측 분야를 개척한 장본인이면서, 극지방 그린란드를 직접 찾아가 연구하던 탐험가였습니다. 

▲ 알프레드 베게너와 그가 쓴 책 <대륙과 해양의 기원> 주요 페이지

현장 중심의 연구를 거듭하던 베게너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큰 부상을 입고 후방에서 기상업무를 맡게 되었는데요. 이때 집필한 책이 그 유명한 ‘대륙과 해양의 기원’입니다. 서로 떨어져 있는 대륙들이 원래는 한 덩어리로 붙어있던 초대륙 판게아(Pangaea)였다는 주장을 담은 이 책은 전쟁이 끝난 후 내용을 대폭 보완한 3판이 나오면서 크게 주목받게 됩니다.

▲ 그린란드를 탐험하던 알프레드 베게너

이 책은 당시에 베스트셀러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지만, 학계의 반응은 ‘지질학자도 아닌 기상학자의 터무니없는 발상’이라는 반대 의견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대륙 사이에 육교와 같은 긴 통로가 있다가 그것이 차츰 가라앉았다는 ‘육교론’이 정설로 자리 잡고 있었는데요. 1930년 베게너가 그린란드 탐험대를 이끌다 조난당해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목숨을 잃자, 그의 이론 역시 차츰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습니다.

그의 이론이 다시 주목받고 그가 혁명적인 과학자로 재조명된 것은 한 세대 뒤인, 1960년대 *판구조론이 등장하고 난 후였습니다. 베게너의 사례는 전문가/비전문가, 전공/비전공에 대한 구분 때문에 자칫 한발 앞선 과학적 발견을 놓치게 될 뻔한 경우였습니다.

※ 판구조론(plate tectonics): 지구의 표면이 딱딱하고 깨어지기 쉬운 여러 개의 판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판들이 이동함에 따라 지진, 화산 등 다양한 지질현상이 발생한다는 이론

OLED 디스플레이 역사를 뒤바꾼 삼성디스플레이의 대반전

▲ 2001년 삼성의 OLED 개발 당시 시제품

삼성디스플레이는 2000년대부터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글로벌 기술 리더십을 주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특히 OLED 분야는 휴대폰 패널부터 시작해 현재 IT 기기, TV에 이르기까지 세계시장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삼성디스플레이가 처음부터 OLED 기술 주도권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1998년 프린스턴 대학에서 기존 형광유기재료보다 효율이 3∼4배 더 높은 인광물질로 OLED를 개발하는데 성공했고, 이후 이를 바탕으로 2000년대 들어 일본 기업인 산요와 코닥이 공동 개발한 5.5인치 OLED 디스플레이 시제품을 발표했는데요. 이때만 해도 OLED 디스플레이 상용화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것은 일본 기업들이었습니다.

실제로 2000년대 초부터 능동형 유기발광다이오드(AMOLED)를 연구해온 삼성이 2005년 양산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하자 당시 OLED 기술을 선도하던 일본은 이 같은 목표를 허무맹랑한 것으로 여겼는데요. “차라리 후지산을 물구나무 걸음으로 오르겠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라며 삼성의 시도를 평가절하하기도 했습니다.

▲ 2007년 9월 세계 최초 AMOLED 양산 라인 가동 후 첫 번째 제품으로 만든 ‘전자화단’

그도 그럴 것이 1990년대 후반 우리나라는 다양한 국내 기업들이 OLED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했지만 대부분 사업화에 실패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디스플레이 시장은 LCD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데요. 삼성이 양산하겠다고 선언한 AMOLED는 LCD에 비해 훨씬 고화질의 영상을 구현할 수 있지만, 당시 일본 기업들도 본격적인 상용화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에 삼성의 AMOLED 양산 시도는 무모한 행보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 AMOLED 양산 라인 증설 이후 모습

하지만 이 같은 예상을 깨고 삼성은 2007년 초 일본 교세라의 휴대폰, 국내 아이리버의 MP3 플레이어 등에 중소형 OLED 패널을 납품하며, AMOLED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같은 해 9월 충남 천안에서 본격적인 양산에 성공해 일본 주요 공급선에 피처폰용 패널을 공급하면서 독보적인 기술로 중소형 OLED 패널 시장을 주도하기 시작했습니다.

▲ (좌) AMOLED를 탑재한 일본 교세라 ‘미디어 스킨’과 삼성전자 ‘애니콜 햅틱 아몰레드’, (우) 2010년 슈퍼아몰레드를 탑재한 삼성전자 웨이브와 갤럭시S

‘사업성이 부족하다’, ‘상용화가 어렵다’ 등의 이유로 모두가 꺼렸던 시도이기에 이와 같은 반전은 디스플레이 시장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는데요. 특히 OLED 기술에 있어서 경쟁사들과 격차를 벌리고 있다고 믿고 있었던 일본 기업들은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삼성디스플레이는 지금도 선명한 화질과 슬림한 디자인, 낮은 소비전력 등 다양한 혁신 기술을 통해 OLED 디스플레이 시장을 선도하고 있는데요. 알고 보면 삼성디스플레이의 OLED 기술이야말로 당시 불리한 조건을 일순간에 역전시킨 대반전의 기록이자, 불가능하다는 편견을 깨고 도전한 결과입니다. 왼손잡이의 날을 맞아 편견을 이겨내고 디스플레이의 역사를 다시 써 내려간 삼성디스플레이의 OLED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