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설화에 따르면, 강원도 산골에 질그릇을 구워서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이 있었다. 그릇에 대한 애정이 깊은 그는 훌륭한 스승을 만난 후 왕에게 바칠 한 벌의 그릇을 만들게 될 정도로 뛰어난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하지만 갑자기 삶이 풍족해진 그는 방탕한 생활에 빠지게 되고, 죽을 위기에 빠졌다가 구사일생으로 겨우 살아난다. 지난날의 방황을 크게 후회한 그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그릇을 만들기로 다짐하고 다시 일어선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가 만들어낸 작품은 작은 술잔이었다. 자신의 스승에게 술잔을 바치며 술을 가득 따랐는데, 술잔에 가득히 담겨있던 술은 순식간에 한 방울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놀란 스승 앞에서 이번엔 다시 술을 반쯤 부었더니 술잔에 담긴 술은 그대로 있었다. ‘경계할 계(戒)’에 ‘찰 영(盈)’자를 써서 지은 술잔의 이름은 ‘가득 참을 경계하는 잔’이라는 의미의 ‘계영배’였다.
▲ 과유불급을 가르치는 술잔, 계영배 (출처: YTN 사이언스)
사실 이런 형태의 술잔을 처음 만든 사람은 고대 그리스에도 있었다. 이렇게 생긴 술잔을 피타고라스의 컵이라고 불렀는데, 평범한 컵과 비슷해 보이지만, 바닥 중앙에는 구부러진 작은 관이 솟아 나와 있다. 구부러진 관 아래로 술을 채워 넣으면 술은 절대 흘러내리지 않는다. 하지만 구부러진 관 이상의 높이로 술을 채워 넣으면, 대기압과 수압의 힘으로 인해 관이 술을 빨아들이게 되고, 술은 슬잔 아래로 빠져나간다. 구부러진 채 아래로 향하고 있는 관의 끝보다 술의 높이가 낮아지면 비로소 빠져나가는 행위를 멈춘다. 이러한 원리를 ‘사이펀(Siphon)의 원리’라고 부른다.
▲ 사이펀의 원리를 활용한 계영배의 단면과 작동 과정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마주하는 화장실 속 변기에도 역시 사이펀의 원리가 숨어있다. 변기는 마치 우물처럼 늘 일정한 높이로 물이 차 있고, 손잡이를 눌러 물을 내리면 차 있던 물이 빠지며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온다. 도대체 물은 어디로 내려가는 걸까? 변기 안에는 U자 모양으로 만들어진 배수관이 있는데, 이 배수관을 통해 물은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가면서 빠진다. 재미있는 건, 작은 컵으로 물을 천천히 부으면 변기의 물은 일정 높이 이상 올라가거나 내려가지 않는다. 하지만 거대한 물통으로 한꺼번에 많은 양의 물을 쏟아부으면, U자 모양의 관으로 물이 순식간에 몰리면서 강한 압력으로 물을 관의 가장 높은 꼭대기까지 밀어 올린다. 한번 정점까지 밀려 올라간 물은 중력으로 인해 하수도로 내려가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신호등이 바뀌기 직전까지 꼬리를 물며 따라붙는 사거리의 자동차들처럼 물이 완전히 빠져서 틈이 생길 때까지 계속 빨아들인다. 도대체 어떤 원리로 이렇게 높은 곳에 있던 물이 더 높은 곳을 지나 낮은 곳을 내려오는 걸까?
베르누이의 원리로부터 이해하는 유체의 흐름
사이펀은 관을 이용해서 높은 곳에 있는 액체를 낮은 곳으로 이동시키는 장치를 말한다. 사이펀의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베르누이의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스위스의 이론물리학자이자 수학자인 다니엘 베르누이는 이미 널리 알려진 에너지 보존 법칙을 토대로 1738년 일정하게 흐르는 유체의 속력과 압력, 그리고 높이의 관계에 대한 법칙을 발표했다. 액체나 기체와 같은 유체의 운동을 연구하는 유체역학에서 유체의 속력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넓은 면적을 지나는 유체의 속력보다 좁은 틈을 지나는 유체의 속력이 더 빠르다는 것이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 베란다 창문을 살짝 열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바람이 들이치는 현상을 통해 베르누이의 원리를 확인할 수 있다. 유체의 속력이 증가하면 압력이 감소하며, 압력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유체가 흐르기 때문에 창문 틈을 향해 바람이 몰리며 빠르게 흐르게 된다.
▲ 높은 곳의 액체 표면을 대기압이 눌러서 액체가 관속으로 밀어 올라가게 되고, 그 액체는 다시 중력에 의해서 아래쪽으로 내려가게 된다.
이제 베르누이 원리를 통해 사이펀의 원리를 이해해보자. 직선이나 완만한 곡선의 관이라면 당연히 액체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동시킬 수 있다. 유체에도 중력이 작용하기 때문에 우리가 물건을 놓치면 바닥으로 떨어지듯이, 유체도 자연스럽게 아래로 이동한다. 하지만 U자형의 휘어진 관이 두 개의 통에 거꾸로 꽂혀 있다면, 아무리 열심히 배치를 조절해봐도 이대로 높은 통에 있는 액체가 더 높은 위치의 관을 통과해 낮은 통으로 떨어지지는 않는다. 여기서 사이펀의 원리가 작용하면 대기압과 중력을 이용해서 현 상태에서 액체가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다.
우선 유체가 끊어지는 부분이 없이 연속적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구부러진 관 안에 액체가 가득 채워야 한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빨대로 음료수를 마실 때처럼 낮은 통 쪽의 관에서 강하게 빨아들이면 된다. 그다음엔 그대로 두자. 중력 때문에 낮은 위치에 있는 통 위의 관에 가득 찬 액체는 아래로 떨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관에 가득 차 있는 나머지 액체는 어떻게 될까. 베르누이의 원리에 따라 빠르게 이동하는 유체는 압력이 감소한다. 그렇다면 관 안의 압력은 감소할 것이며, 관 밖의 통 속에 존재하는 액체의 압력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에 액체는 관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러한 과정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며, 관 속의 압력이 통 속에 걸린 대기압보다 낮게 유지가 된다면, 액체가 낮은 통으로 완전히 이동할 때까지 멈추지 않고 계속 관을 따라 흐르게 된다.
일상생활 속 다양하게 적용되는 사이펀의 원리
원두커피를 내리는 과정에서 사이펀의 원리를 이용하기도 한다. 종이 필터에 담긴 커피에 뜨거운 물을 부어 짧은 시간 동안 추출하는 핸드드립 커피나 상온 혹은 차가운 물에 오랜 시간 우려낸 커피 원액을 추출하는 더치 커피와 달리 물이 담긴 플라스크를 가열해서 발생하는 증기의 압력 차를 이용해서 커피를 추출한다. 1804년 스코틀랜드의 공학자 로버트 네이피어(Robert Napier)가 처음 개발을 했는데, 마치 작은 실험실을 보는 것처럼 시각적인 효과가 뛰어나다. 알코올램프나 버너, 최근에는 할로겐 빔 히터를 사용하여 하단의 물이 담긴 플라스크를 가열하고, 열을 받으면 유리관을 통해서 물이 빨려 올라가서 커피 가루를 만난다. 상단 플라스크에 물이 커피 가루의 2배 정도가 되면, 스틱을 사용해서 커피 가루와 물을 잘 섞어준다. 이후 하단의 가해지던 온도를 낮추면, 플라스크 내부의 압력이 줄어들어 커피는 필터를 거쳐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한다. 이런 식으로 물이 커피 분말을 두 번 통과하면서 우리는 깔끔한 맛과 풍부한 향의 커피를 얻게 된다.
▲ 사이펀의 원리를 활용한 커피머신
같은 원리로 바닥까지 깊고 무게가 무거워서 들어서 뒤집을 수 없는 수족관 어항의 물을 갈 때도 사이펀의 원리는 유용하게 활용된다. 높은 어항의 유리 벽을 넘어 교체가 필요한 물이 비교적 수월하게 관을 통해 빠져나온다. 자바라 펌프라는 이름은 생소하지만 아마 아코디언의 주름통처럼 생긴 빨간 부분에 투명하고 하얀 대가 달린 플라스틱 펌프는 자주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커다란 통에 담긴 액체를 옮길 때 주로 사용하는데, 기름이나 화학물질처럼 위험성 때문에 다루기 어려운 액체를 손으로 만지지 않고 쉽게 옮길 수 있다. 최근에는 전동식 자바라 펌프도 등장하여 사이펀의 원리가 발동하기 전까지의 과정을 전기 에너지가 만들어내는 압력으로 도와주기도 한다.
사이펀의 원리는 변기에서 냄새가 올라오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도 한다.
가정에서 변기의 밑 부분을 확인해보면 S자 형태로 굽은 부분이 존재한다. 사이펀의 원리 덕분에 평소에 일정한 양의 물이 관의 굽어진 바로 밑부분까지 고여 있을 수 있고, 이 위치는 눈에 보이는 변기 물의 높이와 일치한다. 여기서 물을 내려주면 변기 안의 물이 차면서 압력 증가로 굴곡이 있는 부분을 유체가 넘어가고, 전기를 사용하는 동력이 없어도 사이펀의 원리를 통해 물이 내려가게 되는 것이다. 이후 변기 내부의 물이 빠지는 과정에서 압력도 역시 줄어들고, 다시 관의 굽어진 부분까지 물이 잠기며 원래 상태로 돌아온다. 세면대 아래 위치한 파이프 역시 변기와 비슷한 구조로 되어있다. 아래 U자형 배관에 마개의 역할을 하는 물이 고여 있어서 하수구로부터 벌레나 냄새가 올라오는 것을 막아준다. 최근에는 물을 절약하기 위해 사이펀의 원리를 이용하지 않는 변기도 등장했다. 형태를 바꿀 수 있는 관을 이용해서 물을 내리기 전까지는 U자형을 유지하다가 버튼을 누르면 관의 모양이 거꾸로 뒤집어지면서 중력의 힘으로 유체를 보낸다. 기존 구조의 변형을 통해 새롭게 나타난 혁신은 사이펀의 원리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응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버려지는 물을 활용한 사이펀식 소수력 발전기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에는 동전을 던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트레비 분수가 있다. 오래전 로마사람들은 북동쪽에서 흐르는 강물을 끌어오는 거대한 수로를 건설했고, 깊은 골짜기 때문에 고가 수로나 지하 수로를 만들기 어려운 경우에는 사이펀의 원리를 이용해서 물을 공급했다. 수원지가 로마보다 높기 때문에 중간에 거치는 장애물이 높거나 낮더라도 물길이 끊어지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우리나라 충북 진천군에 위치한 백곡 댐도 댐 규모에 비해 홍수 시 유입되는 물이 많아 처음에 양수기를 잠시 작동시켜서 사이펀의 원리로 배수가 자동으로 되도록 했었으나 노후화로 철거되고 초평댐이 명맥을 잇고 있다.
▲ 초평댐 사이펀 여수로 (출처: 위키피디아, Gcd822)
높은 곳에 있는 물은 중력 때문에 낮은 곳으로 흐른다. 중력에 의해 바닥으로 떨어지는 물의 흐름으로 물레방아를 회전시켜 전기에너지를 발생시키는 방식을 수력 발전이라고 부른다. 수력 발전은 보통 발전 설비 용량에 따라서 대수력, 중수력, 소수력, 미니수력, 마이크로수력, 피코수력 등으로 구분한다. 소수력 발전은 1,000kW에서 10,000kW 정도의 출력 규모를 갖는데, 에너지 변환효율이 좋아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친환경 에너지라 지구 온난화 방지에도 공헌을 하기에 향후 기대가 되는 화석 연료의 대체 에너지 중에 하나다.
이러한 소수력 발전 설비에도 사이펀의 원리가 쓰인다. 이걸 사이펀식 소수력 발전기라고 하는데, 흐르는 물의 높낮이 차이가 작아 제대로 된 발전기를 설치할 수 없을 경우에, 사이펀 관으로 물을 흘려보내서 발전기 설치 공간을 확보할 수 있도록 설계된 설비를 말한다. 설치가 간단하다는 장점 외에도, 설치에 들어가는 공사비용도 저렴하다 보니 비슷한 환경에서 계속 설치하고 있다.
특히 2011년, 국내에서는 최초로 발전소의 방류수를 활용한 사이펀식 소수력 발전기가 등장했다. 방류수는 발전소에서 냉각수로 활용한 후에 바다로 배출되는 물을 말하는데, 이 물을 사용하면 오염이 전혀 없이 소수력 발전기를 돌릴 수 있다. 남제주화력발전소에 설치된 이 발전기는 1년 동안 만들어내는 전기의 양은 제주도 내의 200여 가구가 무려 1년간 사용할 수 있는 양이다. 사이펀의 원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꾸준히 우리의 삶을 바꿔왔으며, 계속 응용되어 새로운 형태로 일상생활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최근 온실가스 농도가 더 이상 증가하지 않도록 순 배출량을 0으로 하자는 탄소 중립도 주목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사이펀식 소수력 발전기처럼 비교적 작지만 효율적이고 오염이 전혀 없는 발전기 개발에 충분한 응원이 필요하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만들어내는 혁신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다.
※ 이 칼럼은 해당 필진의 개인적 소견이며 삼성디스플레이 뉴스룸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