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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가을이 찾아왔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인지 여름은 늘어나고 가을은 짧아지는 현상이 매년 증폭되고 있다. 서리가 내린 초록 이파리들은 갑작스러운 계절의 변화를 보여준다. 풍성한 색채의 풍경은 곧 회색의 계절로 바뀔 것이다. 가을의 색채에서 겨울의 흑백으로, 다시 봄의 색채로 변하는 흐름은 자연의 순리이지만, 색채를 향한 인간의 노력은 치열한 과정을 거쳤다. 자연의 안료를 사용한 그림에서 나타나는 색상 수는 많지 않았다.

흑백이 중심이 된 색상은 문자(文字)의 시대를 상징한다. 검은색 문자의 시대는 길었다. 고대 이집트 문자처럼 컬러로 새겨진 경우도 간혹 있지만, 20세기 초까지 문자는 검은 글씨였다. 특히 인쇄술의 발명 이후 글자는 검은색으로 찍혔고, 바탕의 종이는 아이보리 빛을 띈 흰색이었다. 수천 년간 이어진 문자 중심의 문명에서 컬러는 지식이나 이성이 아닌 감성의 표현이었다.

19세기 후반 컬러 사진 기술의 발명과 인쇄 기술의 발전은 흑백의 세계에 조금씩 색채를 깃들게 했다. <위대한 개츠비>로 표상되는 19세기 말의 신분 변화도 컬러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조선의 선비들도 한동안 흑백의 수묵화에서 벗어나 조금씩 컬러를 수용하기 시작했다. 흑백에서 컬러로 넘어가는 변화는 텍스트 시대에서 이미지나 영상 시대로 전환됨을 의미한다.


믿는 대로 보인다?! 컬러에 대한 인식과 재현

자연의 컬러를 재현하는 인류의 과제는 구석기 동굴벽화부터 지금의 메타버스 시대까지 계속되고 있다.
컬러 재현은 근본적으로 컬러 인식에 기반을 둔 문제이다. 사실 광학적이고 과학적인 컬러 인식과 재현보다 더 무서운 것이 심리적이고 관념적인 인식이다. 인간의 시지각은 망막에서 인식되는 그대로를 뇌에서 복원하지 않는다. 눈에서 시작되는 시신경 체계부터 후두부의 시각피질 사이에서 수많은 보정(calibration)의 과정을 거친다.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컬러 노이즈도 제거하고, 맹점에 가려져서 안 보이는 부분도 채워 넣게 된다. 포토샵 전문가들이 작업하는 일들이 눈과 뒤통수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달리 생각하면 눈앞에 보면서도 스스로 믿지 못하는 현상이 매일 발생하는 셈이다.

▲인간의 시신경 체계는 망막으로부터 후두부의 시상에 이르기까지 긴 경로를 거친다. 이 과정에서 형태와 컬러, 공간의 이미지가 체계를 갖춘 인식의 세계로 바뀌게 된다.경우에 따라서는 눈 앞에 보이는 것을 노이즈로 착각하여 무시하기도 하고, 티끌 같은 것도 커다랗게 보이며 응시할 수 있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영어 속담은 “믿는 대로 보인다”라는 말로 바뀌어야 과학적 사실에 부합한다. 사물의 고유색 개념처럼 우리는 생각하는 대로 세상을 본다. 우리가 인식하는 컬러도 결국 자기 마음대로 보는 것이다. 불교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문구도 지각과 인식의 문제를 마음의 차원에서 조정하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 보는 것과 믿는 것은 앞뒤를 바꿀 수 있지만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엮여 있다는 의미다.

컬러에 대한 믿음과 상징이 종교에서 파생된 경우도 흔하다. 예를 들어, 중세 기독교의 성화에서 보이는 황금색이나 빨간 포도주색은 상징색이다. 빨간색은 피를 흘린 희생을 뜻한다. 종교를 위한 희생의 표현에 빨간색이 자주 등장한다. 희생을 거쳐 성인이 되면 금빛 후광을 씌워준다. 황금색은 고귀한 존재를 상징한다. 인도의 힌두교 사원에도 금빛이 많다. 사원에 금을 바치는 자기희생으로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의 결과다.
중국의 황제들도 고귀한 존재임을 증명하며 한결같이 금빛 옷을 입었다. 금빛은 다른 한편으로 재물을 상징하기 때문에 황제의 시대 이후에는 부의 상징으로 남았다. 반면에 파란색은 고결한 성스러움의 색이다.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푸른 옷을 표현하려면 희귀한 청금석(lazurite)에서 추출한 울트라 마린 안료를 사용했다.

수많은 컬러가 그러하듯 컬러의 체계와 이론들은 모두 무채색과 유채색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
세상의 모든 색은 순수 색상과 무채색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다. 자연에서는 형광 연두색과 같은 극단적인 색상 값을 발견하기 어렵다. 컬러 디스플레이의 색 대역을 넓히는 노력과 혁신은 순수 색상의 표현을 향한 갈망의 표현이다. 그래서 CIE.1931 색 대역표에서 포괄할 수 있는 컬러 디스플레이의 영역은 점차 원색의 가장자리를 향해 발전했다. 전문가용 디스플레이 장치는 정확한 색상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하면서도 넓은 범위의 색역을 모두 표현할 수도 있어야 한다.

▲ CIE 1931 색 공간 그래프

모두가 광색역의 기술을 추구할 때, 흑백의 디스플레이를 고집하는 경우도 있다.
전자책 단말기에 사용되는 e-잉크 기술이 대표적이다. 컬러 디스플레이보다 전력 소모가 적고 시력 보호에 우수하다는 이유에서 기술 개발도 지속하고 있다. 또한 텍스트에 집중하려면 흑백의 대비가 컬러보다 보기 편하다는 믿음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Z세대 이후의 어린이들은 젖먹이 시절부터 스마트폰의 영상을 보며 자랐다. 어릴 때부터 컬러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아마도 문자 체계조차 흑백 컬러에 한정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세대가 될 이들에게도 컬러 감각을 제한하는 환경은 여전하다. 사회적으로 남아 있는 컬러에 대한 고정관념때문이다. 대체로 5세부터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은 성별에 따른 컬러의 집착이 강하다. 남자아이들이 파란색을 선호하고, 여자아이들이 핑크 계열을 선호하는 성향에는 주변 환경에서 받은 영향이 크다. 우리는 관습적으로 아기가 태어날 때부터 파란색이냐 분홍색이냐로 성별을 구분한다.

남자는 파란색이라는 고정관념은 강력한 기제를 형성하기 때문에 분홍색 옷을 입은 남자 어린이를 발견하기 어렵다. 집단적인 컬러 고정관념이 강하기 때문이다. 고정관념의 형성에는 어린이 대상의 장난감, 학용품, 의류를 제조하고 유통하는 마케팅 전략도 크게 작용했다. 컬러에 대한 고정관념은 청소년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해소되기도 하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상징색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일상의 영역에서 빨간색은 여성을 상징하고, 파란색은 남성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 남녀 의류뿐만 아니라 화장실의 표지 구분부터 화장품의 포장까지 컬러의 고정관념을 확대 재생산한다.


메타버스로 이어진 컬러 세계의 확장

매년 늦여름부터 가을 사이에는 세계적인 기업들의 스마트폰 출시 경쟁이 두드러진다.
손바닥 안에 들어가야 하는 한계점 때문에 더 큰 디스플레이를 향한 경쟁은, 접거나 휘는 폼팩터(Formfactor)의 혁신으로 이어졌다. 소비자들에게 새로운 기술에 대한 호감을 갖게 하려면 제품의 외형 또한 그럴듯해야 한다.
제품의 외관에 대한 소비자의 판단은 대체로 소재의 우수함과 컬러 느낌에서부터 형성된다. 최근에 적용되고 있는 유리 소재나 반사성 재료는 우수한 기능과 함께 제품에 고급스러운 재질감을 부여한다. 그런 소재를 기반으로 한 외관 컬러는 그러데이션과 함께 영롱하게 빛나는 느낌으로 드러나게 된다. 

▲삼성전자 갤럭시 Z플립3 휴대폰의 비스포크 에디션 (출처: 삼성전자 홈페이지)

얼마전 출시한 갤럭시 Z플립3 휴대폰의 비스포크 에디션은 컬러 팔레트의 구성에 따라 커버를 49가지 조합으로 맞출 수 있다. 자신의 개성을 중요시 여기는 소비자들이 직접 컬러를 선택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다.
향후에는 스마트폰 외관 전체가 디스플레이로 구성되어, 원하는 디자인과 컬러를 마음대로 설정해 외관 디자인으로 자신을 표출할 날도 머지않아 보인다.

소비자는 이제 단순한 수용자에 머무르지 않게 되었다. 일반 대중으로 지칭되던 시대는 지났다.
각자 자신의 의견과 취향을 SNS, 동영상 플랫폼을 비롯하여 메이커 스페이스나 소규모 강연회, 창업 인큐베이터 프로그램에서도 표출하고 있다. 거대 담론보다는 스몰 토크의 시대다. 문자의 시대가 흑백의 논리에 함몰되고, 대량생산의 시대가 한정된 컬러에 머물렀다면, 새로운 시대는 컬러 스펙트럼을 무한대로 넓히는 과정에 있다.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인해 외부 활동에 한계를 느낀 현 사회에서는 현실 세계 대신 메타버스라는 가상현실 시스템을 넓혀 가고 있다.

▲ 실시간 3D 이미지로 구현되는 메타버스 제페토 (출처 : 스브스뉴스)

메타버스 세계는 컴퓨터 그래픽 컬러로 만들어진 가상의 공간이다.
자연에서는 찾기 힘든 형광색이나 화려한 그라데이션의 표현이 가능한 세계다. 그래픽 이미지로 살아 움직이는 환경은 사실적인 실재감도 필요하지만 가상세계만의 특성 표현도 중요하다. 자연을 모방하는 물리적 효과를 넘어서 물질과 광학 법칙에서 벗어난 대상의 구현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메타버스에서만 누릴 수 있는 컬러 경험이 우리의 시지각을 더 자극하고 컬러 감수성의 폭도 넓혀줄 것이다. 새로운 세계인 가상의 공간을 경험하기 위한 디스플레이 장치는 자연색의 재현 능력과 함께 극단적인 인공 색의 표현 능력도 필요하다. 첨단 디스플레이 덕분에 인간의 컬러 인식 능력이 확장될 것이다. 넓게 보는 만큼 생각도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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