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문필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J. W. Goethe)는 문학과 철학의 대가였을 뿐만 아니라 색채학 연구에도 심취한 전인적 학자였다. 1780년대부터 20년간 지속된 그의 색채 연구는 뉴턴(I. Newton)의 과학적 접근과는 다르게 컬러의 심리적 기능에 집중되었다. 1792년 <광학에 관한 기고>에서 괴테는 밝음과 어둠의 이원론적인 구분을 뼈대로 노랑과 파랑의 2원색 체계로 전체 색채를 파악하자고 제안했다. 더 나아가 1812년에 발간한 <색채론> 제3권의 “논쟁” 단원에서는 뉴턴의 광학 실험과 컬러 스펙트럼의 연구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뉴턴이 실험한 조건이 너무 이상적이라고 비판했다.

뉴턴은 암실의 벽에 작은 구멍을 뚫어놓고 태양광이 가늘게 들어와서 생기는 광선에 프리즘을 투과시켜 얻은 무지개색 스펙트럼을 관찰한 광학적 색체계를 1704년 <광학(Opticks)> 저술에서 제안한 바 있다. 뉴턴의 실험 조건이 지나치게 한정적이라고 평가한 괴테는, 우리의 일상에서 보이는 색채와 상황에 따라 달리 인식되는 컬러 배색의 문제를 탐구했다. 언뜻 비과학적인 입장에서 뉴턴을 공격했다고 오해할 수도 있지만, 괴테의 색채 연구는 당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색체계는 이후 현상학 계열의 철학자들과 인상주의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뉴턴과 라이프니츠(W. Leibniz)의 수학 논쟁에서도 드러났던 것처럼 당시 유럽에서는 국가 간의 군사적 대결뿐만 아니라 학술적 다툼도 치열했다. 컬러의 질서를 찾아 체계를 정립하는 문제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서로 경쟁했다. 뉴턴과 괴테의 서로 다른 입장은 결국 색채의 원리로 향하는 여정이 컬러의 광학적 분석을 향한 방향과 심리적 수용이라는 방향으로 나뉘는 근거가 되었다.

▲르 블롱의 채색의 조화에 관한 저서 <콜로리토>

독일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활동한 르 블롱(J. C. Le Blon)은 18세기 초 뉴턴의 광학 연구와 괴테의 색채론 사이에서 획기적인 색체계를 제안했다. 그는 화가이면서 판화가였는데, 스위스와 네덜란드까지 국경을 종횡무진 넘나들며 컬러 표현 기법을 탐구했다. 르 블롱은 메조틴트(mezzotint) 기법의 다색 판화를 위해 연구한 결과를 정리해서 1725년에 채색의 조화에 관한 저서 <콜로리토(Coloritto)>를 출판했다. 그는 빨강, 파랑, 노랑의 3원색 색체계를 판화와 인쇄에 처음 적용하며, 삼원색에 검정을 추가하면 모든 색상의 인쇄가 가능하다고 증명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던 4원색 중 녹색을 색상 원판에서 제거했는데, 지금의 컬러 인쇄에 쓰이는 CMYK 4원색 체계의 모태가 되었다. 그는 빛으로 구현하는 가산혼합 체계와 안료로 표현하는 감산혼합의 색체계가 서로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는 등 당시 사람들의 혼란한 컬러 인식을 정리해주었다. 그러면서 기존의 4원색에서 하나가 줄었으므로 비용을 아낄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당시의 인쇄와 판화는 검정 한 가지로만 표현하던 흑백의 세계였다. 컬러의 시대는 아직 멀리 있었다.


색채표현 기술의 발전

18세기 유럽은 여러 면에서 역동적인 변화를 창조하는 중심지였다. 절대왕정의 황제와 제후들은 스스로 계몽 군주로 인식되기를 원했고, 그 결과 유럽 각지의 궁정에는 많은 예술가와 기술자들이 머물렀다. 우리나라 조선 시대의 도화서 화원들처럼 유럽의 궁중 화가들도 군주의 위엄과 풍요로움을 작품에 담았다. 화려한 궁전이 도심에 우뚝 선 대도시에는 수많은 직업군의 인력들이 모여들었다. 그중에서 색채 안료를 다루는 사람들을 ‘컬러맨(colourman)'이라고 불렀다.

▲1829년 영국 런던의 St Martin’s Lane 거리에 있던 컬러맨의 가게를 묘사한 그림

고대의 연금술사나 약제사처럼 컬러맨은 화가를 위해 컬러 안료와 물감을 만들어 공급했다. 정확한 색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다. 다양한 광석과 자연재료를 가공하여 화학적으로 안정된 색을 내는 일은 지금도 쉽지 않다. 수년간의 수습생 시절을 배움으로 견뎌내고 수백가지 안료를 다루는 능력을 인정받은 후에나 ‘컬러맨’ 간판을 달 수 있었다. 이들은 안료 가게이자 화방의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문명의 발전과 자원의 증가는 소수 컬러맨을 넘어서 기업화로 확장되었다. 18세기 말에는 화구상자 형태의 물감이 등장하고, 지금까지 유명세를 지키는 물감 회사들이 설립되었다. 물론 고급 천연 재료를 가공하고 판매하는 안료상은 지금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컬러를 다루는 일은 소수 전문가의 영역이다.

컬러맨이 활동하던 시대에는 화가들을 위한 색채 가이드북 같은 지침서도 자주 출판되었다. 색을 이해하고 비교하면서 컬러 감각을 키우는 것은 화가에게 꼭 필요한 자질이었다. 종이에 구현된 색체계는 대체로 뉴턴의 도해처럼 평면의 원형을 따라가는 색상환 형태로 표현되었다. 원형 칸의 가까이에는 인접 색을 표시하고 반대편에는 보색을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색채 이론 책들은 저마다 얼마나 정확하고 풍부한 색상표를 제공하는지를 두고도 경쟁했다. 컬러맨과 화구 기업의 증가에 따른 색채 표현 기술의 발전 때문에 책의 2차원 평면은 수많은 색을 늘어놓기에 부족한 지경에 이르렀다.

▲오토룽게의 입체의 색상구  (출처: 위키피디아, Philipp Otto Runge)

이런 문제를 극복하고자 1810년 오토 룽게(P. Otto Runge)는 평면 색상환의 한계를 뛰어넘는 입체의 색상구(color sphere)를 제안했다. 구체의 상단에는 흰색, 하단에는 검은색, 중간에는 평균 밝기의 색상을 배열했다. 색체계를 입체로 표현하는 막중한 과제는 1900년 <색상 표기법>을 출간한 먼셀(A. H. Munsell)로 이어졌다. 미국의 화가이자 미술 교사였던 먼셀은 컬러 체계의 정립에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그의 색상구는 점차 색채의 가감을 적용하여 구체에서 나무 모양으로 변했다. 색상, 명도, 채도 3요소의 관계를 구현하는 컬러 트리(color tree)로 변한된 먼셀의 색체계는 이후 많은 색체계 연구의 토대가 되었다.

한편 독일의 오스트발트(F. W. Ostwald)는 1909년 노벨 화학상 수상 이후 색체계 연구에 심취했는데, 1916년 저서 <색채 입문>과 1909년 논문 <색의 조화>를 발표했다. 먼셀의 색상 체계가 이미 명성을 얻고 있었지만, 오스트발트는 색채를 색상, 명도, 채도로 분류하는 방법에 반대하며, 흰색과 검은색 사이의 중성색, 회색이 없는 순색상, 회색이 섞인 일반색으로 구분했다. 흰색과 검은색이 섞인 정도를 세밀하게 수치화하여 표기할 정도로 엄격했던 오스트발트의 색체계는 지나치게 난해하다는 평을 얻으면서 독일에서조차 금지당했지만, 영국과 미국에서는 환영받으며 물감 제작의 기준이 되기도 했다.


삼원색 컬러 체계와 디스플레이

잉크나 안료를 섞어 만드는 감색혼합 방식의 색체계가 아닌 가산혼합 방식의 광학적 색체계도 뉴턴의 발표 이래 꾸준히 명맥을 유지했다. 19세기 초 영국의 과학자 토머스 영(Thomas young)과 독일의 물리학자 헬름홀츠(H. Helmholtz)를 거치며 광학적 색채론은 인간의 망막에 빨강, 녹색, 파랑의 삼원색 수용체가 있을 것이라는 과학적 추론으로 이어졌다. 그들의 연구를 수용하여 미국의 물리학자 오그던 루드(Ogden Rood)는 1878년에 <현대색채론 -예술과 산업적 적용>이라는 연구 저서를 출판했다.

▲ CIE 1931 색 공간 그래프

당시의 색채학 서적이 수많은 컬러 도표를 나열했던 것에 비해 루드의 저서에는 단 몇 개 정도의 도표만 수록되었는데, 우리가 많이 보던 CIE 1931과 같은 삼원색의 색공간표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뛰어난 업적은 감색혼합 재료인 물감과 가산혼합 특성을 보이는 가시광선의 컬러 파장 길이를 서로 연결했다는 점이다. 그의 통합적인 색체계는 즉시 전 세계로 전파되었는데, 특히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그림이 탁해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원색의 물감을 화폭에 짧은 붓 자국으로 나열하며 채워갔는데, 각자 광학적 컬러 효과를 물감으로 표현하고자 애썼다. 색의 기준을 만들고 논쟁하는 컬러 체계의 험난한 여정은 20세기에 종이 대신 디스플레이 장치를 만나면서 다른 길목으로 접어들게 된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은 TV 화면이 캔버스를 대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작곡가이자 행위예술가였던 그는 1964년 일본인 기술자 수야 아베(Shuya Abe)와 함께 TV 브라운관에 광학적 컬러 효과를 만들어내는 최초의 비디오 신시사이저를 개발했다. 다른 비디오 아티스트들이 촬영과 편집이라는 전통적인 방식에 머무를 때, 백남준은 자신의 신시사이저 장치를 활용해 당시에는 상상하기 힘든 광학적 이펙트로 사이키델릭(psychedelic)한 스타일을 창조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컬러 스펙트럼이 전자기파의 일부분인 것처럼, 브라운관을 향한 전자총의 전자기장을 조작하면 원하는 컬러 패턴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일찍 간파했다.

▲ 백남준은 1963년부터 TV 화면을 가변적인 캔버스처럼 활용했다. 다양한 영상 소스에는 그의 신시사이저를 거쳐 화려한 효과를 추가되었고, 말년에는 네온사인과 레이저를 사용하기도 했다. (출처: 위키피디아, Libjbr)

그로부터 50년이 지나서 미디어아트는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누구나 쉽게 즐기고 감상하는 예술 장르로 자리 잡았다. 손으로 그리는 그림에 소질이 없어도 컴퓨터 화면에 이미지를 만들어 온라인으로 팔 수 있고, 누구나 영상 콘텐츠를 만들어 전 세계 대중에게 공개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백남준의 말처럼 디스플레이 장치는 새로운 예술가들에게 가변적인 캔버스다. 미디어아트 작가들은 디스플레이 장치를 디지털 캔버스로 활용한다. 이미지에서 표현하는 명암비를 비롯해 다양하고 디테일한 색채 묘사를 디스플레이를 통해 재현한다.

컬러의 질서를 찾는 긴 여정은 컬러맨의 안료와 학자들의 색상환을 거쳐 이렇게 첨단 디지털 디스플레이에 다다른다. 이제 물감은 필요 없다. 스스로 빛을 내고 눈부신 컬러를 보여주는 디스플레이가 우리의 눈앞에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