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0년에 개봉하여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공상과학 영화 ‘인셉션(Inception)’에는 다른 사람꿈에 침투하여 그 사람의 기억을 조작하고, 생각마저 바꿔버리는 기상천외한 기술이 등장한다. 바로 ‘메모리 임플란트(memory implant)’라는 기술이다. 주인공은 이 기술을 활용하여 포섭해야 할 사람 두뇌에 자신의 생각을 주입하거나, 그 사람의 생각을 추출하여 해독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그야말로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불가능한 기술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의외로 전문가들은 멀지 않은 미래에 실현될 기술 중 하나로 메모리 임플란트를 꼽고 있다.
문제는 메모리 임플란트 기술을 개발하는 것보다 이를 활용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점이다. 반도체칩을 기반으로 하는 현재의 컴퓨팅 구조로는 메모리 임플란트처럼 엄청난 정보를 처리해야 하는 기술을 실현하기에는 한계가 따른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현재의 컴퓨팅 구조로는 미래의 전력 공급이 불가능하다?
과거 이세돌 9단을 이기며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인공지능(AI) 시스템인 알파고(AlphaGo)를 떠올려 보자. 당시 300여 대의 기업용 서버를 결합하여 제작된 알파고는 1,000개가 넘는 중앙처리장치(CPU)와 200개에 가까운 그래픽처리장치, 그리고 100만 개가 넘는 메모리 반도체로 이루어져 있었다.
바둑에서 나올 수 있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계산하거나 다음 수를 계산하기 위해 이처럼 엄청난 규모의 부품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이 메모리 임플란트 기술의 상용화 가능성을 일축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기껏 바둑 한 판을 두는데도 집채만 한 규모의 장비들이 필요한데, 하물며 꿈속에 등장하는 방대한 기억들을 처리하려면 얼마나 많은 컴퓨터와 부품들이 갖춰져야 하는 것인가를 지적한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부품이나 장비의 숫자도 문제이지만, 이들이 정상적으로 작동될 수 있도록 공급하는 전력 문제도 현 컴퓨팅 구조에서는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전력이 소모되는 이유는 현재의 컴퓨팅 시스템이 가진 구조의 한계 때문이다. 반도체는 크게 연산을 하는 CPU와 정보를 저장하는 메모리로 나뉘는데, CPU와 메모리 간에 데이터를 처리하고 저장하는 과정에서 병목 현상이 발생하며 많은 전기를 소모하게 된다. 반면에 사람의 뇌는 수많은 데이터를 처리하더라도 사용하는 전력은 거의 발생하지 않는 수준이다. 예를 들어 비슷한 수준의 정보를 처리하는 데 있어, 슈퍼컴퓨터는 메가와트(MW) 급 전력을 사용하지만, 사람은 기껏해야 20와트(W) 정도의 에너지만을 소모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처럼 사람의 뇌가 별다른 전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막대한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이유는 뉴런(neuron)과 시냅스(synapse)를 잇는 방대한 연결 구조가 병렬로 이루어진 덕분이다. 뉴런은 나트륨이나 칼륨 통로와 같은 이온 통로를 발현하여 전기적인 방법으로 신호를 전달하는 세포다. 또한 뉴런과 다른 세포를 연결해 주는 시냅스는 수시로 이어졌다 끊어지면서, 에너지 소모량을 최소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뉴런과 시냅스에서 발생하는 전기적 신호를 반도체 형태로 구현할 수 있다면, 대용량의 데이터라도 병렬로 처리해서 적은 전력으로도 복잡한 연산이나 추론이 가능해진다. 사람의 뇌를 모방한 반도체가 탄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의 뇌를 모방한 반도체의 개념이 수립되면서 산업계는 본격적인 개발에 나섰고, 그 결과 사람의 뇌를 닮은 반도체인 ‘뉴로모픽(neuromorphic)’ 칩을 개발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인간의 뇌를 모방한 반도체 칩, ‘뉴로모픽 컴퓨팅’
뉴런 형태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뉴로모픽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반도체는 기존 반도체와는 완전히 다른 원리로 작동하는 것이 특징이다. 기존 반도체는 컴퓨터의 설계 원리인 ‘폰노이만(Von Neumann)’ 방식으로 작동한다.
폰노이만이란, 컴퓨터 중앙처리장치의 내장형 프로그램을 처음 고안한 미국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존 폰노이만(John Von Neumann)’ 박사를 가리킨다. 그는 지난 1949년 에드삭(EDSAC)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컴퓨터를 만들었으며, 이때 고안한 방식인 중앙처리장치(CPU)와 주 기억장치, 그리고 입출력장치의 3요소는 오늘날에도 거의 모든 컴퓨터 설계에 적용되고 있다.
이와 같이 폰노이만 박사의 업적을 기려 반도체 작동 방식에 그의 이름을 붙였는데, 이 방식은 데이터가 입력되면 이를 차례대로 처리하므로 계산이나 프로그램 실행처럼 단순한 컴퓨팅 작업에는 최적의 효율을 자랑한다. 다만 연산과 저장장치를 별도로 두기 때문에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병목현상이 발생한다는 단점을 갖고 있다.
반면에 사람의 뇌를 모방한 뉴로모픽칩은 그 안에 여러 개의 ‘코어(core)’들을 갖고 있다. 이 코어에는 트랜지스터를 포함한 몇 가지 전자 소자들과 메모리 등이 탑재되어 있다. 코어의 일부 소자는 뇌의 신경세포인 뉴런의 역할을 담당하며, 메모리칩은 뉴런과 뉴런 사이를 이어주는 시냅스 기능을 담당한다. 이렇게 인공 뉴런 역할을 하는 코어를 사람의 뇌처럼 병렬로 구성하기 때문에 이전 프로세서에 비해 훨씬 적은 전력만으로도 더 많은 양의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다.
▲뉴로모픽 칩이 내장된 IT기기는 이용자의 행동과 습관, 주위환경까지 인지하여 작동한다. (출처: Qualcomm Korea)
뉴로모픽 기술을 사용하면 데이터 처리 과정을 한 번에 통합할 수 있기 때문에 효율적이고, 에너지 소비량도 줄어들게 된다. 이와 동시에 인간의 뇌처럼 학습하고 연산하는 능력까지도 증가하게 된다. 연산 능력이 증가하게 되는 이유는 뉴로모픽칩 스스로가 학습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용자의 행동과 습관 그리고 주위 환경까지 인지하여 작동하는 똑똑한 컴퓨팅 시스템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따라서 뉴로모픽칩이 내장된 컴퓨터는 이전의 반도체칩 기반 컴퓨터들처럼 미리 프로그램 된 방식으로만 작동하지는 않는다. 주변 상황을 감지하여 스스로 학습하는 방식으로 처리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산업계는 기존의 전통적 반도체에서 탈피하여 뉴로모픽칩이라는 신개념 반도체를 개발하기 위해 열을 올리는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는 인공지능 시스템 때문이다. 1세대 인공지능 시스템의 경우 정해진 논리를 기반으로 특정 문제에 대한 해답을 도출하도록 설계되었다. 처리 과정에 별 문제는 없지만, 기존의 폰노이만 방식 반도체로 처리하기에 조금은 무리가 갈 수밖에 없는 정보처리 과정이었다. 그런데 2세대로 인공지능 시스템이 진화하면서 폰노이만 방식 반도체로는 원활한 처리가 어렵게 되었다. 심화 학습 단계인 딥러닝을 통해 추론 과정과 의사결정 과정이 더해지면서 방대한 정보처리에 많은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 단계 더 진화한 3세대 인공지능 시스템이 개발되면 더 이상 폰노이만 방식 반도체로는 정보처리가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3세대 인공지능 시스템에서는 컴퓨터가 인식하기 어려운 이미지나 영상, 그리고 음성 등의 데이터가 혼재해 있는 경우가 많은 만큼 그에 맞는 신개념 반도체 개발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인텔이 개발한 ‘로이히(Loihi) 리서치 칩’으로 구성된 8백만-뉴런 뉴로모픽 시스템 포호이키 비치(Pohoiki Beach) (출처: intel)
현재 뉴로모픽칩 분야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보이고 있는 회사로는 인텔과 퀄컴, 그리고 IBM 등이 있다. 인텔은 인공지능에 특화된 연산이 가능한 ‘로이히(Loihi)’ 칩을 최근 공개한 바 있고, 퀄컴은 뉴로모픽칩의 일종인 제로스(Zeroth) 프로세서 개발을 발표한 바 있다. 또한 IBM은 딥러닝을 가능하게 만드는 트루노스(True North) 칩을 공개해 주목을 받았다.
이처럼 굴지의 글로벌 기업들이 뉴로모픽칩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는 이유는 그 수요가 무궁무진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장조사업계의 조사에 따르면 뉴로모픽칩 시장은 2016년의 70억 원 규모에서 2022년에는 2,700억 원 시장으로 연평균 86% 성장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또한 그로부터 5년 뒤인 2027년에는 12조 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놀라운 점은 향후 전개될 뉴로모픽칩의 성능이다. 인공지능 시스템에 기반한 혁신적 정보처리 과정을 넘어서 사람처럼 후각이나 촉각 기능을 인지하는 수준으로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뉴로모픽 칩을 통해 ‘촉각’을 가진 로봇이 탄생했다. (출처: cornell.edu)
지난 3월 인텔과 코넬대의 공동 연구진은 동물의 생물학적 후각 체계를 구현한 수학 알고리즘을 뉴로모픽 칩에 구현했다고 발표하여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동물이 냄새를 맡을 때 뇌에서 일어나는 전기적 반응에서 알고리즘을 도출하여 하드웨어상으로 구축한 것이다. 테스트 결과 이 칩은 아세톤, 암모니아, 메탄 등 10가지 냄새를 구별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7월에는 싱가포르 국립대 연구진이 뉴로모픽 칩을 통해 로봇에 ‘촉각’ 기능을 부여했다고 발표하여 로봇업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연구진은 인공피부에 촉각을 인지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는데 해당 인공피부는 인간의 감각 신경계보다 1000배 이상 더 빨리 촉각을 감지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저장과 연산은 물론 인식, 패턴 분석까지 하는 뉴로모픽, 사람의 사고 과정과 비슷해 안면 인식 등과 같은 기술을 빠르게 처리할 수 있다. 여기에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컴퓨터와 촉각을 느낄 수 있는 로봇 개발 소식이 뉴로모픽 칩의 시대가 올 날이 머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 이 칼럼은 해당 필진의 개인적 소견이며 삼성디스플레이 뉴스룸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