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임금이 먹던 음식을 수라라고 한다. 잘 차려진 밥상을 보고 ‘수라상 같다’라고 하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좋은 재료를 써서 숙련된 주방 상궁이 만들지만, 임금이 바로 먹지는 못한다. 기미 상궁이 은수저로 먼저 맛보고, 독이 있는지 아닌지 판단한 다음에야 먹을 수 있다. 21세기에 사는 우리는, 어쩌면 모두 임금님 자리에 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대신 먼저 맛을 봐줄, 전자 혀가 있기 때문이다.
인공 세포막을 통해 다섯 가지 기본 맛을 판별해내는 센서 ‘전자혀’
전자혀는 맛을 측정하고 수치화해서 비교/평가하는 기기다. 우리가 혀에 있는 1만여 개의 미뢰를 통해 맛을 느끼는 것처럼, 전자혀는 미각 센서를 통해 맛을 느낀다. 우리 혀가 느끼는 단맛, 짠맛, 신맛, 쓴맛, 감칠맛을 센서를 통해 감지해, 숫자로 바꾼다. 쉬워 보이지만 아직 제대로 구현되진 못했다.
당도계나 염도계처럼 특정 성분량을 재는 기기는 있지만, 사람 같은 전자혀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시/촉/청각 기술과는 다르게, 미각은 후각과 함께 천천히 발전하고 있는 감각 기술이다.
왜 그럴까? 분명히 혀는 다섯 가지 맛을 느끼지만, 우리 뇌에서 느끼는 맛은 종합 예술에 가깝다. 재료, 냄새, 씹히는 느낌, 먹는 순간의 분위기 등이 모두 조합된 결과다. 특히 후각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맛을 내는 물질도 수도 없이 많다.
심지어 어떤 맛은 미뢰에서 느끼지도 않는다. 매운맛은 통각으로 분류되고, 떫은맛은 혀의 상태에서 비롯된다. 이 모든 게 어떻게 조합되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예전에는 맛을 측정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식재료나 음식에 들어간 특정 성분을 측정한다는 개념만 있었다.
성분을 측정한다는 개념을 바꾼 사람은 일본 규슈 대학의 키요시 토코(Kiyoshi Toko) 교수다. 햄버거에 당근이 들어가자 맛이 좋아지는 것에 호기심이 생겨 시작한 미각 연구를 통해, ‘맛을 측정한다’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미각 센서 개발에 성공했다. 맛은 혀가 느끼지 않는다. 혀는 맛을 내는 물질이 미각 세포에 닿을 때 흐르는 전기를 느낀다. 그 느낌은 신경 세포를 통해 뇌로 전달되어, 어떤 맛이란 걸 알게 된다. 진짜 맛은 미각 세포와 후각, 뇌가 함께 만든다고 할 수 있다. 미각 센서는 그 원리를 이용했다.
인공 세포막을 개발해 다섯 가지 기본 맛을 판별할 수 있는 센서를 만들었다. 딱, 혀가 하는 일만 비슷하게 따왔다. 지금은 전자화학 센서부터 바이오, 광학 센서까지 다양한 센서 기술이 사용된다.
전자혀, 어디에 쓰일까?
맛이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면, 전자혀로 분석할 수 있는 맛은 진짜 맛일까? 우리 혀가 느끼는 맛이 다섯 가지 맛의 조합이라면, 전자혀도 비슷하게 느낀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우리가 느끼는 맛은 다른 몇 가지 음식을 조합해서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커피 우유 맛은 보리차와 우유, 설탕을 섞은 맛이고, 요구르트 맛은 우유에 식초를 더하면 된다.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이런 식으로 다섯 가지 맛을 혼합해 특정 물질의 맛을 만들 수 있고, 반대로 특정 물질의 맛을 분석해 다섯 가지 맛의 조합으로 기록할 수도 있다.
전자혀는 어떤 맛이라고 말하는 대신, 어떤 물질이 어떤 다섯 가지 맛의 조합을 가졌는지 수치로 기록한다. 물질이 가진 맛 지문을 모을 수 있는 셈이다. 맛 지문을 파악할 수 있다면, 다양한 일에 쓸 수 있다. 사람이 하면 위험한 작업을 대신하거나, 자동으로 물질 상태를 판별하거나, 독성 물질을 확인하거나, 빠르게 작업을 처리해 시간이나 비용을 줄여야 할 때도 유리하다.
▲ASTREE 전자혀 (출처:https://www.instrument-
이런 특징을 가진 전자혀는 주로 산업이나 식품 연구, 의료 연구용으로 쓰인다. 다만 전자 혀가 측정하는 것은 맛의 조합이라, 성분 분석과는 다르다. 아직 널리 보급되진 않았지만, 다양한 분야에서 쓰임새를 찾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상용화된 애즈트리(ASTREE)의 전자혀(E-tongue)는 식품, 음료, 의약품 등의 분야에서 맛을 평가하는 장치다.
정량적 결과 도출 및 위험 상황에서 연구원을 대신해 물질을 분석하기 위해 쓰인다. 다른 전자혀는 화학 플랜트 폐수의 품질 평가를 위해 쓰인 적도 있고, 살충제와 페놀 성분 검출을 위해 쓰이기도 했다. 가짜 약이나 불량약을 구별하기 위해 쓸 수도 있다고 한다. 박테리아의 유형을 구별해, 세균 감염을 조기에 식별하는 연구도 성공했다. 캡사이신 농도를 측정해 매운 정도를 판별하는 전자혀도 나왔다.
전자혀는 어떻게 발전할까?
▲떫은맛 감지하는 '전자 혀' 소믈리에 개발! (출처: UNIST 유튜브)
우선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더 다양한 맛을 측정할 수 있는 센서, 더 저렴해진 센서가 나올 것이다.
지난 7월, UNIST 에너지 및 화학공학부 고현협 교수팀은 떫은맛을 감지하는 전자혀를 발표했다. 우리가 맛으로 느끼지만 미각 센서에 잡히지 않는 맛을, 전자혀가 감지하는 기술을 개발한 것이다. 이를 통해 덜 익은 감이나 와인, 홍차 같은 떫은맛을 가지고 있는 물질을 미세하게 구별할 가능성을 열었다.
▲떫은맛 분자와 결합하면 ‘소수성 응집체’가 만들어지는 ‘이온 전도성 수화젤’을 이용해 유연 기판 위에 만든 ‘전자혀’ (출처: UNIST)
재질도 유연하고, 제작도 간편해 앞으로 다양한 분야에 적용될 수 있다. 저렴한 미각 센서는 기술이 널리 퍼지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비록 여러 가지 맛을 측정할 수는 없지만, 단일 업무에 쓰이는 저가 센서는 이미 여러 곳에 도입되기 시작했다.
좀 더 다양한 용도로 쓰일 가능성도 크다. 지금까지 전자혀는 식품, 제약, 의료, 안전, 물 분석 산업을 중심으로 쓰였다. 품질과 신선도를 평가하고, 불량품이나 오염을 감지하고, 맛을 평가하기 위해서. 의료 분야에선 혈액이나 소변, 땀을 모니터링하기 위한 용도로도 개발 중이다. 살충제나 독극물, 토양 및 수질 오염을 확인하기 위해서도 쓰인다.
▲IBM에서 개발한 전자혀인 하이퍼테스트는 인공지능(AI)을 이용해 액체를 분석하여 맛을 식별한다. (출처: IBM Research)
거기에 전자코(후각 센서)나 인공지능이 결합한다면 어떨까? 지난 2019년 7월, IBM에서 하이퍼테이스트(Hypertaste)라는 전자혀를 공개했다. 휴대가 가능한 범용 전자혀로, 기기를 간단히 액체에 담그면 AI가 분석해 물질이 무엇인지, 상태는 어떤지를 알려준다. 위조 와인이나 위스키를 판별하기 위해 쓸 수 있다. 후각이 맛에 끼치는 영향이 큰 만큼, 전자코와 조합해 맛을 판별하는 연구도 진행 중이다.
맛을 정량화할 수 있다면, 특정 음식의 맛을 기록해 보관할 수도 있다. 유명 음식점, 비전의 소스를 사용한 떡볶이, 어머니가 해주신 찌개 맛을 남길 수 있다는 말이다. 그때그때 잘 팔리는 제품을 측정해 맛 트렌드를 추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국가별 선호하는 맛에 따라 같은 이름에 조금씩 다른 맛을 가진 라면을 개발할 수도 있다.
최근에는 전자혀로 수집한 맛 지문을 역으로 이용해, 맛을 느끼게 해주는 기술도 발표됐다. 3D 프린터로 음식을 찍어내는 시대에, 이런 맛 지문과 그걸 이용해 맛을 재현하는 기술은, 앞으로도 계속 호기심을 자극할 것이 분명하다. 아직 한계는 분명하지만, 기술 개발이 늦은 만큼 가능성은 더 크게 열려있다.
※ 이 칼럼은 해당 필진의 개인적 소견이며 삼성디스플레이 뉴스룸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