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에 개봉한 영화 ‘터미네이터 2’를 본 사람이라면 주인공을 암살하기 위해 미래에서 온 로봇과의 마지막 대결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아무리 총에 맞아도 곧바로 치유되는 무시무시한 로봇을 가까스로 물리치는 해당 장면은 영화의 하이라이트였다. 특히 불사조 같은 악당 로봇 T-1000은 이후 시리즈에도 모습을 바꿔 계속 등장할 만큼 관객들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로봇의 자가 치유 능력을 보여준 '터미네이터 2'의 T-1000 (출처: 트라이스타픽처스)
영화가 과학자들에게 영감을 준 것일까. T-1000의 ‘자가 치유’ 개념은 과학자들의 연구에도 영향을 미쳤다. 2000년대부터 자가 치유 물질이 속속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자가 치유 물질은 말 그대로 균열이나 손상된 기능을 스스로 치료하는 물질을 말한다. 처음에는 고분자 화합물 중심으로 개발되더니, 최근에는 세균을 이용해 스스로 콘크리트의 균열을 메우는 바이오 콘크리트까지 개발되고 있다.
회복 캡슐에서 회복 기능 탑재한 고분자까지
▲자가 치유 플라스틱 (출처: whitegroup.beckman.illinois.
초창기 개발된 자가 치유 고분자 물질은 ‘마이크로캡슐’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2001년 스콧 화이트 미국 일리노이주립대 항공우주공학과 교수팀이 처음 개발한 방식이다. 액체 화합물을 머리카락 굵기 정도로 작은 다량의 캡슐에 넣고, 이를 다시 플라스틱과 섞어 굳힌 형태다.
플라스틱에 균열이 생기면 캡슐에서 화합물이 새어 나와 빈틈을 메운다. 당시로선 획기적인 발명이었지만 캡슐이 일회용이라 똑같은 부위에 균열이 생기면 속수무책이라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최근에는 물체에 자가 치유 물질을 공급하는 통로를 만들어 계속 ‘리필’해주는 방식이 도입됐다.
▲자가치유 소재를 자르고 다시 붙인 60초 후, 추 1kg을 들 수 있을 정도의 강도로 회복 (출처: 한국화학연구원)
아예 고분자 재료 자체가 자가 치유 기능을 갖도록 만드는 연구도 활발히 진행 중이다. 분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을 이용해 끊어져도 몇 분이 지나면 다시 원래대로 달라 붙게하는 방식이다.
한국화학연구원에서는 감귤에서 추출한 구연산과 숙신산을 이용해서 강력한 수소결합을 형성해 끊어져도 다시 붙는 고분자를 개발했다고 올해 초 발표했다. 이 고분자로 만든 3mm 두께의 밴드를 칼로 자른 뒤 단면을 맞대 놓자 1분 뒤 1kg의 추를 들어 올릴 만큼 회복됐다.
▲한국화학연구원이 개발한 자가 치유 신소재가 절단 실험을 겪은지 두 시간만에 접합된 모습 (출처: 한국화학연구원)
그 밖에도 원래의 형태에서 변형될 경우 특정한 자극을 줬을 때 다시 형태가 복원되는 형상기억 고분자, 외부에서 자극이 주어지면 화학반응이 일어나 손상을 감시하는 손상감지형 고분자 등 여러 종류의 자가 치유 고분자 물질이 개발되고 있다.
다양한 자가 치유 물질 활용 사례
▲구멍난 부위를 스스로 치유하는 첨단 힐로테크 섬유를 사용한 바람막이 (출처: 코알라트리)
이런 자가 치유 물질은 최근 상용화 수준에 이를만큼 성능이 좋아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기술이다. NASA는 2030년까지 우주선과 우주복에 자가 치유 기술을 도입하는 걸 목표로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작년에는 우주선 구조물에 산소에 반응하는 자가 치유 물질을 넣는 기술을 개발했다. 우주선에 미세한 구멍이 생겨서 산소가 유출되는 상황이 생기면 즉시 반응해서 구멍을 메워주는 것이다.
또 NASA는 우주의 강력한 자외선과 열로 손상된 우주복 섬유를 치유하기 위해 개발하던 기술을 민간 기업과 공유했다. 의류 기업 코알라트리는 NASA의 기술을 활용해 구멍이 뚫렸을 때 손톱으로 문지르면 다시 복구되는 ‘힐로 테크(Hilo Tech)’라는 자가 치유 섬유를 개발했다. 이 소재로 만든 옷은 나무나 금속에 찔려서 구멍이 뚫렸을 때 손톱으로 살살 문지르면 구멍을 메울 수 있다. 발수코팅은 물론이며 가볍고 쉽게 접을 수 있어서 유용하다.
▲실리콘 절연체에 균열이 생긴 모습 (왼쪽), 마이크로 캡슐에서 나온 용액이 균열을 메우고 있다. (오른쪽) (출처: 한국과학기술연구원 KIST)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연구팀은 송전 케이블을 이어주는 중간접속함이라는 부위가 손상됐을 때 자가 치유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땅속에 매설된 송전 케이블의 중간접속함은 국내에만 약 13만 8760개가 되는데, 2001년부터 2014년까지 총 43회나 고장을 일으켰다.
특히 2011년에는 고장이 정전으로 이어져 재산 피해를 내기도 했다. 연구팀은 중간접속함에서 전선을 감싸 외부 방전을 막아주는 실리콘에 자가 치유 고분자를 넣은 캡슐을 섞었다. 실리콘에 균열이 생겼을 때 캡슐이 터져 에폭시 수지와 가교 물질이 나와 균열을 메우고 굳혀주는 것이다. 이 기술이 실제 현장에 적용되면 전력회사의 큰 고민을 덜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왼쪽에서 오른쪽 시간순으로 ’바이오 콘크리트’가 스스로 치유되는 모습 (출처:Delft Technical University)
네덜란드 델프트 공대 연구팀은 세균과 젖산칼슘을 섞어 만든 캡슐을 콘크리트 속에 섞어 넣은 자가 치유 기술을 2011년에 개발했다. 콘크리트가 손상되면 이 세균이 수분을 만나 젖산칼슘을 먹이로 콘크리트를 채울 석회석을 생성하는 것이다. 이 자가 치유 콘크리트는 작년부터 1686년 지어진 네덜란드 헤트 루 궁전을 개축하는 공사에 쓰이고 있으며, 현재 한국에서도 유통되고 있다.
▲액정 깨져도 복구되는 ‘자가 치유 디스플레이’ 개발 (출처:YTN 사이언스)
한편, 국내 연구팀은 물리적, 전기적으로 손상돼도 스스로 복구하는 디스플레이용 발광소재를 지난해 개발했다. 외부 충격이나 전기적인 손상에 취약한 스마트폰 디스플레이에 활용할 수 있는 자가 치유 소재이다. 소재를 절단해도 30분이면 원상복구되고, 전기적인 과부하로 거뭇거뭇 한 변색이 생겨도 전원을 끄면 원래대로 돌아오기 때문에 향후 스마트폰과 웨어러블 디스플레이 소재로 기대되는 소재다.
과학자들이 실제로 자가 치유 기술을 영화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 착안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과학자들의 상상력과 노력은 영화에서 보여준 것보다 훨씬 다양한 방면에서 실용적으로 자가 치유 기술을 활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앞으로 자가 치유 물질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꿔 놓을지 함께 지켜보자.
※ 이 칼럼은 해당 필진의 개인적 소견이며 삼성디스플레이 뉴스룸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