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보면, 홀로그램 화상 통화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타노스가 손가락을 튕겨 전 우주 생명체의 절반을 사라지게 한 날로부터 5년 뒤, 캡틴 마블이 수천개의 행성에 일어난 일을 처리하느라 너무 바쁘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멤버인 로켓과 마치 바로 옆에 있는 듯 티격태격하다 사라진다. 이처럼, 멀리 떨어져 있어도 지금 눈앞에 있는 듯 느껴지게 해주는 기술이, 바로 텔레프레전스(Telepresence)다.
1980년 MIT 인공지능 연구소의 설립자 마빈 민스키가 만든 말로, 원래는 원격으로 로봇을 조작한다는 아이디어에 붙인 이름이다. 당시 스리마일 섬에서 일어난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보면서, 1948년 출간된 로버트 A. 하인라인의 소설 ‘왈도(Waldo)’나온 원격 조작 인공손을 떠올렸다고 한다. ‘나’는 침대 위에 누워있지만, ‘내 손’은 공장에서 일하는 기술을. 게다가 그런 기술은, 미 해군 원격 조종 심해 탐사 프로젝트 등으로 이미 연구되고 있었다.
▲영화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의 텔레프레전스 기술을 활용한 회의 장면 (출처: 20세기 폭스 코리아)
십여 년 뒤, 텔레프레전스는 커뮤니케이션 기술에 대한 아이디어로 진화한다. 당시 성장하고 있던 컴퓨터와 인터넷 기술 덕분이다. ‘나’와 ‘로봇’은 떨어져 있지만, 같이 있는 것처럼 조작할 수 있다는 개념이, ‘나’와 ‘너’는 떨어져 있지만 같이 있는 것처럼 소통할 수 있다는 개념까지 포함하게 된 것이다. 화상 통화라는 개념은 19세기 후반부터 등장했고, 1970년대부터 상용화되긴 했지만 비싸써 별로 사용되지 않았다. 디지털 기술은 실시간 영상 통화를 표준화시키고 저렴하게 만들어, 널리 쓰일 기반을 만들었다.
1990년부터 94년까지 수행된 ‘온타리오 텔레프레전스 프로젝트’는, 이런 영상 기반 커뮤니케이션 기술로 어떻게 일할 수 있는지를 점검했던 프로젝트였다. 1993년 설립된 텔레슈트(TeleSuite)는 처음 성공한 텔레프레전스 회사로, 호텔을 떠나지 않고 사무실에서 일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는 화상 회의 기술을 제공했다. 2001년 일어난 9.11 테러는 비즈니스 이동에 불편함과 위험을 느낀 사람들이, 진지하게 화상 회의 시스템-텔레프레전스를 도입하는 계기가 됐다.
텔레프레전스의 진화
마빈 민스키가 제안한 개념에 대한 연구는 3가지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먼저 장비적 측면이다. 로봇을 원격으로 조작하기 위해서는 몰입형 조작 장치가 필요했고, 이때 만들어진 가상 장비(Virtual fixtures)는 나중에 가상현실 헤드셋의 원형이 된다.
다음으로 감각적 측면이다. 몰입형 텔레프레전스(Immersive Telepresence)라는 개념이 몰입형 조작 장치와 함께 등장하게 된다. 현실감이 뛰어난 경험을 가리키는 말로, 현재 쓰이는 텔레프레전스 장비의 목표이자, 가상 현실 체험의 원형이기도 하다.
▲공간 허무는 ‘텔레프레전스’ 기술 시현 (출처: MBC NEWS)
그 밖에도 많은 기술이 이 ‘실감’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다. 카메라를 보지 않고 디스플레이를 보고 있어도, 카메라를 보고 있는 듯 상대방과 눈 맞춤 할 수 있게 해주는 기술은 기본이다. 2개의 떨어진 회의실에서, 같은 디자인을 가진 테이블을 사용해 하나의 테이블을 이용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 경우에는 전용 회의실이 필요하다. 지연이 없는 깨끗한 음성과 영상 전달 기술도 필요하다. 조명을 이용해 두 회의실 분위기를 통일하기도 한다.
▲MicroSoft사의 홀로포테이션 기술 시현 (출처: I3D Past Projoects)
자잘한 기술처럼 보이지만, 사람은 언어만이 아니라 표정이나 몸짓 같은 다양한 신호로 분위기를 읽으며 대화한다. 외국인과 대화할 때 번역기 앱을 잘 쓰지 않는 이유도, 대화가 바로바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진짜로 대화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려면, 이런 다양한 신호를 제대로 전달하고, 불필요한 지연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영화 ‘킹스맨 2’등에서 보여준 홀로그램 회의 장면이나, MS가 개발 중인 홀로포테이션(Holoportation)은 그런 의미에서 궁극적인 텔레프레전스라고 할 수 있다.
텔레프레전스의 미래
▲텔레프레전스 로봇 ‘아바 500’ (출처: 아이로봇)
마지막은 텔레프레전스 로봇이다. 텔레프레전스를 좁게 정의하면 고화질 화상 회의 기술과 원격 조작 로봇이라고 할 수 있다. 원격 조작 로봇은 드론이나 재난 구조 로봇 등으로 따로 성장했지만, 확장된 텔레프레전스 개념 안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사용되는 로봇을 텔레프레전스 로봇이라고 부른다.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로봇과는 다르게, 바퀴가 달린 지팡이에 카메라와 마이크, 디스플레이가 붙어 있는 형태다.
마빈 민스키가 아이디어를 얻은 소설 ‘왈도’의 주인공 왈도가 ‘중증 근무력증’ 때문에 자기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던 것처럼, 텔레프레전스 개념에는 위험한 작업을 탈 없이 할 수 있다는 안정성, 살면서 필요한 이동 시간을 줄여주는 효율성과 더불어 실제 활동이 어렵거나 떨어져 있어서 함께 하기 어려운 사람에게 활동 수단을 제공한다는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텔레프레전스 로봇은 그런 원격 활동성을 이용자에게 제공하는 수단이다.
▲장애인이 원격 조작하는 텔레프레전스 로봇 ‘오리히메 D’ (출처:로이터 연합)
가장 많이 쓰이는 제품은 슈테이블 테크놀로지사의 빔(Beam), 더블 로보틱스사의 ‘더블 2’ 등이다. 일본에서는 ‘OriHime-D’라는 로봇을 이용해 장애를 가진 사람이 원격으로 서빙할 수 있는 카페를 임시로 연 적도 있다. 일본의 한 서점에서는 코로나19로 인해 임시 휴업하게 되자, 텔레프레전스 로봇을 이용해 서점을 돌아다니며 직원에게 책을 추천 받는 이벤트를 연 적도 있다. 감염 우려가 있는 병원에서 환자 진단 시에 이용하기도 하고, 에드워드 스노든이 TED 행사에 출연할 때 이용하기도 했다.
앞으로는 어떻게 쓰일까? 성공한 기술은 이름이 사라진다. 이제 ‘월드와이드웹(WorldWideWeb, WWW)’란 단어를 별로 안 쓰는 것처럼. 화상회의가 일상화되면, 텔레프레전스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한편 가상현실 기술이 확장 현실(XR, eXtended Reality) 개념으로 강화되면서, 이쪽으로 통합되고 있기도 하다. 최근 페이스북은 화상회의 솔루션‘워크 플레이스’에 VR 기능을 포함했다. 어찌 되었건 방향은 같다. 우리는 떨어져 있어도 함께 있기를 원하며, 불편하지 않게 의사소통을 하고, 일할 수 있기를 원한다.
※ 이 칼럼은 해당 필진의 개인적 소견이며 삼성디스플레이 뉴스룸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