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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란 참 제멋대로다. 때때로 뇌는 과거의 괴롭고 힘들었던 기억을 숨기고 마치 그 시절이 아름다웠던 것처럼 추억하게 만든다. 어떤 기억은 가끔 왜곡되어 남기도 하는데, 한 공간에서 같은 일을 경험했더라도 나와 다른 사람의 기억이 서로 다른 것도 이 때문이다.

‘시각 잔상효과(Persistence of vision, POV)’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뇌는 눈의 망막을 통해 이미지를 전달받으면 사물이 시야에서 사라져도 뇌에 그 이미지(잔상)를 남긴다. 사물은 이미 눈앞에서 사라졌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기억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없지만 있는 것처럼 잠시 느끼는 착시현상이 바로 ‘시각 잔상효과’이다. 강한 빛이나 색상을 접했을 때 이러한 현상은 더 두드러지는데 의사의 수술복이 초록색인 것도 잔상효과 때문이다. 강한 조명 아래서 붉은 피를 보다가 흰 의사 가운을 보면 초록색의 잔상이 남는다. 이러한 잔상은 시야를 혼동시키고 집중력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초록색 수술복은 이같은 잔상효과를 최소화하는 역할을 한다. 최근에는 잔상효과를 이용한 다양한 기술들이 등장해 새로움을 주고 있다.


잔상효과를 효과적으로 구현한 시각 장치, ‘조트로프’

수술복을 예시로 든 것처럼 잔상효과는 색이나 빛에 의해서도 일어나지만, 연속 동작의 이미지를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도 한다. 애니메이션과 영화는 방금 전 본 이미지를 뇌가 기억하고 있다가 연이어 보이는 이미지에 겹쳐 보이는 시각의 잔상효과를 이용해 탄생한 ‘발명품’이다. 영화나 애니메이션은 1초에 24장의 이미지를 연속적으로 재생함으로써 마치 이미지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러한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탄생은 1834년 수학자 윌리엄 조지 호너가 만든 ‘조트로프(zoetrope)’에서부터 시작됐다.

▲ 잔상효과를 이용해 그림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조트로프’ (출처: 위키피디아)

윌리엄 조지 호너는 눈의 환각을 이용해 물체가 빠르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장치 ‘조트로프’를 만들어 공개했다. 조트로프는 원기둥 모양의 기구로 내부에는 연속된 동작의 그림이 기둥을 따라 부착되어있다. 외부는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을 내어 돌아가는 원통 안이 보이도록 제작되었다. 사람들이 원기둥의 틈으로 그림을 보면서 통을 회전시키면 마치 그림 내부의 사물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바로 눈의 ‘잔상효과’를 이용한 것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 책장 끄트머리에 말이나 사람이 달리는 모습을 여러 장 그린 후 책장을 빠르게 넘기면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 알게 모르게 ‘조트로프’ 속에 있는 과학적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 우리가 접하는 애니메이션도 잔상효과를 이용한 것이다. (출처: Disney FR)


잔상효과를 이용한 다양한 POV 디스플레이 제품 등장

▲ 일정한 속도로 회전하며 홀로그램 디스플레이를 구현하는 POV 디스플레이 제품 (출처: Wonder World)

POV 디스플레이(Persistence of vision Display)는 시각의 잔상효과를 이용한 새로운 개념의 디스플레이다. POV 디스플레이는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TV나 컴퓨터의 디스플레이와 달리 일정한 속도로 빠르게 회전하는 날개 속에 LED 바가 있는 형태다. 잔상효과를 이용한 POV 디스플레이는 LED 바가 회전하면서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줌으로써 뇌에 남아있는 이미지를 활용해 마치 하나의 영상이 재생되는 것처럼 보여준다.


시각 잔상효과 기술이 가장 효과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분야는?

시각 잔상효과를 가장 효과적으로 적용한 산업은 바로 광고 분야이다. 톰 크루즈 주연의 SF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무려 20여 년 전 영화이지만, 지금 봐도 놀라울 정도로 많은 미래 기술이 담겨 있다. 영화에서 예견한 미래는 지금 현실에서 속속 실현되고 있다. 영화에서는 사람들이 지나갈 때 실시간 홍채인식 시스템을 통해 각 개인에게 특화된 맞춤형 광고를 홀로그램으로 형상화해서 전송한다. 현실에서도 영화와 비슷한 광고기법이 구현되고 있다.

최근 들어 POV 디스플레이 장비가 대중에게 보급되면서, 이를 활용한 홀로그램 광고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POV 디스플레이의 홀로그램은 마치 공중에서 영상이 재생되는 듯한 신선한 이미지를 준다. 이처럼 광고의 홍수 속에서 대중에게 이미지를 각인시킬 수 있는 효과 때문에 최근에는 다양한 글로벌 기업에서 POV 디스플레이를 활용한 광고를 시도하고 있다. 한 글로벌 스포츠 기업에서는 택시 위에 POV 디스플레이를 활용한 신제품 광고로 대중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 보행자의 시선을 끄는 POV 디스플레이 (출처: Firefly on)


지하철 터널에서 광고를 시청하는 방법이 있다?

▲ 일정한 간격의 LED 바가 빠르게 달리는 지하철 내부에서는 하나의 긴 디스플레이처럼 보인다. (출처: 이노벡스)

달리는 지하철 터널 속에도 잔상효과를 노린 광고 비법을 찾을 수 있다. 바로 TAS(Tunnel Advertising System)라 불리는 터널 광고 기술이다. 지하철 터널에 수백 개의 LED 바를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하고 사람들이 잠깐 눈을 돌리는 ‘순간’을 잡는 것이다. 최근 드라마 등 방송프로그램 도입부 화면에 ‘본 영상은 가상광고 및 간접광고를 포함하고 있습니다’라는 문구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가상광고는 방송 프로그램에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해 만든 가상의 이미지를 삽입하는 형태의 광고를 말한다. 가령 스포츠 중계 시 경기장의 빈 공간에 모델이나 제품의 이미지, 브랜드 로고 등을 삽입해 실제 공간에 함께 존재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주는 것이다. ‘TAS(Tunnel Advertising System)’ 광고 또한 연속된 LED 바가 쏟아내는 빛이 뇌에 잔상을 만들며 강력한 가상의 이미지를 만든다. 사람들은 빠르게 지나가는 지하철 터널 밖의 LED 바의 연속 이미지를 하나의 영상으로 인식하게 된다.

▲ 승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지하철 터널 광고 (출처: SPOOR PRO TV)

이처럼 TAS 기술은 지하철 승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신선한 광고 방식이지만, 비용 및 인력 소모 등의 어려움이 따른다. 기나긴 터널에 수많은 LED 바를 설치해야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전동차에서 프로젝트 빔을 쏴 터널 벽면에 영사하는 방식이나 지하철 유리창을 투명 디스플레이로 만드는 방법 등이 있다.


인간의 뇌, 가장 흥미로운 연구대상

시각 잔상효과는 물체가 사라진 후에도 사람의 뇌가 그 물체의 이미지를 기억하는 특성으로 인해 발생한다. 기억은 어떤 자극이 대뇌에 저장되어 있다가 재생되는 현상이다. 과거에 활성화되었던 신경 세포들이 다시 재활성화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기억은 간뇌의 해마 부위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인류는 인간의 ‘기억 메커니즘’에 대해 아직도 완벽하게 알아내지 못한 상태다. 인간의 뇌는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미지의 탐구 대상이다. 작은 원기둥 통에 구멍을 뚫어 보이는 그림으로 움직이는 영상을 고안해낸 것처럼 앞으로 기억 메커니즘과 같은 뇌의 비밀을 활용한 새로운 기술들이 등장해 미래의 우리를 놀라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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