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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은 세계 문자 역사에서 굉장히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누가 만들었고 언제 만들었는지가 알려져 있으며, 어떤 원리로 만들었는지도 안다. 또한, 일반 국민에게 글을 알려주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이렇듯 매우 독창적인 문자이지만, 타이핑이 대세가 된 시대에 한글을 기계에 적용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문자의 기계화가 대부분 로마자 알파벳을 사용하는 나라에서 시작된 탓에, 그들이 만든 기계에서 한글을 쓰기는 힘들었기 때문이다.

글자를 풀어쓰는 방식 즉, 한 위치에 한 글자만 쓰면 되는 알파벳 문자와 달리 한글은 모아 쓰는 문자다. 초성, 중성, 종성이 모여야 하나의 글자가 완성된다. 게다가 모아 쓰는 과정에서 글자의 모양도 조금씩 바뀐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해외에서 만들어진 기계를 가져다 곧바로 한글화해서 쓸 수는 없었다. 그래서 과거에는 한글을 버리고 로마자를 가져다 표기하자거나, 한글을 알파벳처럼 풀어쓰자는 주장을 진지하게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타자기와 한글 기계화

한글을 깊게 연구하기 시작한 시기는 일제 강점기다. 일제에 맞서 민족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일이었다. 이로 인해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나는 등 많은 탄압을 받았지만, 해방 이후 우리말에 관한 관심이 더 높아질 수 있었다.

한글 기계화가 처음 연구된 것도 백여 년 전인 이때다. 첫 번째 한글 타자기는 1914년 재미 교포 이원익이 개발했다. 해외에서 널리 쓰이는 타자기를 고쳐 만든 것으로, 글씨를 옆으로 돌려 찍은 다음 꺼내 보면 세로로 쓰인 한글을 볼 수 있다. 지금도 가끔 볼 수 있는 ‘두벌식’, ‘세벌식’ 같은 ‘벌식’의 개념이 생긴 것도 이때다. 이원익 타자기는 자음과 모음을 쓰임새에 따라 다섯 종류로 나눠 다섯 벌씩 타자기를 만들었다. 1929년 송기주가 만든 한글 타자기는 네벌식이다.


▲ 이원익 타자기로 쓴 글(출처: ‘나는 내 식대로 살아 왔다’ / 저자 공병우)

‘두벌식/세벌식/네벌식’은 어떻게 다를까?

두벌식 : 보통 쓰는 컴퓨터 키보드가 두벌식이다. 한글 키보드를 자음 한 벌과 모음 한 벌로 나눠 쓴다. 외울 내용이 적어서 배우기가 쉽지만, 초성(자음)+중성(모음)+종성(자음)으로 이뤄진 한글 특성상 자음을 여러 번 쳐야 하므로, 자음을 누르는 왼쪽 손에 부담이 간다.

▲ 두벌식 키보드 자판 표준 배열

컴퓨터 자판용 두벌식 키보드와 수동 타자기용 두벌식 자판은 이용하는 방법이 다른데, 예를 들어 ‘앉’이란 글자를 치기 위해 컴퓨터에선 ㅇ+ㅏ+ㄴ+ㅈ을 치면 되지만, 두벌식 타자기에선 ㅇ+(시프트록 키)+ㅏ+(스페이스바 누르고 있기)+(누른 상태에서 백스페이스키)+ㄴ+(백스페이스키 놓기)+ㅈ+(시프트 키)+(스페이스 바 놓기)를 쳐야 ‘앉’이란 글자 하나를 완성할 수 있어서 매우 불편했다.

세벌식 : 초성용 자음 한 벌과 중성용 모음 한 벌, 종성용 자음 한 벌을 각기 다른 키에 배열한 것. 외울 것이 많아 배우기 어렵지만, 익숙해지면 두벌식 키보드보다 빠르게 칠 수가 있다. 예를 들어 ‘앉’이란 글자를 치려면 ㅇ+ㅏ+ᅜ(shift&E)을 치면 된다. 속기용 키보드는 대부분 변형된 세벌식이다.

▲ 한글 박물관에 진열된 속기용 키보드

네 벌식 : 과거 수동 타자기의 표준 배열로 쓰였다. 얼핏 보면 두벌식과 비슷하지만, 초성에 붙는 자음 한 벌, 종성에 붙는 자음 한 벌, 받침이 있는 글자 중성에 쓰는 모음 한 벌, 받침이 없는 글자 중성에 쓰는 모음 한 벌로 구성된다. ‘앉’을 칠 경우 ㅇ(초성)+ㅏ(받침 글자용 중성)+ㄴ(종성)+(하프 스페이스)+ㅈ(종성, shift&[)을 치면 글자 ‘앉’을 만들 수 있다.

▲ 송기주의 네 벌식 타자기

상용화된 한글 타자기는 1948년 공병우가 만든 세벌식 한글 타자기부터다. 초중종성을 나눠 찍었기에 글자가 반듯하진 않았지만, 빠르게 한글을 입력할 수 있어 한국 전쟁 당시 군대에서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다만 형식을 중요시하는 공무원 사회나 한자를 많이 썼던 민간 업무에선 잘 쓰이지 않았다. 이때만 해도 배우기는 힘들지만, 글자가 좀 더 깨끗하게 나왔던 김동훈의 다섯 벌씩 타자기와 세벌식 타자기가 경쟁 관계였다. 반전은 1969년 일어난다. 당시 과학기술처에서 새로운 네벌식 자판을 타자기 표준 자판으로 정하면서, 타자기의 주요 구매처였던 공공 기관이 모두 네벌식 타자기만 쓰기 시작했다. 결국, 공병우식 타자기를 제외하면 70년대에는 네벌식 타자기만 남았다.

 

두벌식과 세벌식, 조합형과 완성형

네벌식 타자기의 세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1983년 정부에서 표준 자판을 한글 키보드 자판과 비슷한 두벌식 자판으로 바꿨기 때문이다. 컴퓨터 보급과 더불어 여러 기기에서 사용되던 입력 장치의 자판을 통일하려는 조치였다. 컴퓨터 도입으로 인해 자판 문제는 어느 정도 정리됐지만, 한글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세상은 쉽게 오지 않았다. PC 역시 알파벳 문화에서 만들어진 기기로 한글을 쓰기 어려웠다. 한글을 처리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부족했던 탓이다.

삼보 보석글 같은 초기 한글 워드프로세서나 한글 도깨비 같은 램상주 프로그램에 의존해야 간신히 한글을 쓸 수 있었다. 한글을 쓸 수 있게 된 다음에는 그걸 어떤 원리로 표현해야 하는가를 두고 ‘조합형’과 ‘완성형’ 논쟁이 일어나게 된다. 당시 정부는 1987년에 완성형을 국가 표준으로 정했지만, 이는 한글 구성 원리와는 다른, 미리 모든 글자를 만들어놓고 불러오는 활판 인쇄와 다를 바 없는 방식이라 많은 이의 반발을 불러왔다. 게다가 ‘쓩’이나 ‘똠방각하’, ‘펲시맨’ 같은 몇몇 글자는 아예 쓸 수가 없었다.

당시 크게 인기를 얻은 ‘아래아한글’ 같은 워드프로세서는 이런 이유로 내부 한글을 조합형으로 처리했다. 초중종성을 조합해 한글을 표기하는 방식으로, 표기할 수 없는 글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1992년에는 조합형 한글 코드 역시 국가 표준이 되었다.

‘조합형/완성형’ 한글은 어떻게 다를까?

조합형 한글은 한글로 글자를 만드는 원리로 컴퓨터 모니터에 보이는 글자를 만든다. 자음과 모음을 조합해서 글자를 만들어 보여주는 방법이다. 한글 자모로 만들 수 있는 현대 한글 11,172자를 모두 표현할 수 있고 고전 한글도 표현할 수 있는 유연한 방식이나, 구현을 위해 차지하는 메모리 용량이 크고 논쟁 당시 통합적인 호환성이 부족했던 점, 대표적 운영체제(OS)에서 완성형을 채택한 점 때문에 현재는 주류로 사용되지 못하고 있다.

완성형 한글은 활자 인쇄처럼, 한글로 만들 수 있는 글자를 미리 만들어두고 불러오는 방법이다. 처음에는 2,350자만 표현할 수 있었지만, 나중에 확장 완성형과 유니코드가 도입되면서 11,172자를 모두 만들어 넣어두고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MS, 조합형과 완성형 논쟁을 종결하다.

이미 실질적인 표준처럼 여겨진 조합형 한글이었지만, 몇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가장 큰 것은 국제 호환성 문제이다. 완성형은 ISO 2022 규격을 따르고 있었지만, 조합형 한글은 그렇지 못했다. 홀로 쓰이던 PC에서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네트워크와 연결되고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진 사람이 소통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게다가 국가 행정 전산망에서는 완성형 표준 한글밖에 쓸 수 없었다.

결국 마이크로소프트는 기존 프로그램 및 데이터와의 호환성을 유지하고 완성형에서 쓸 수 없는 한글 표현을 지원하기 위해, 윈도95와 함께 확장 완성형이라 불리는 한글 코드를 선보이게 된다. 기존의 완성형 코드에는 없는 글자(예:똠, 쓔, 뷁)를 별도의 확장영역에 추가해서 구현하는 방식으로, 이때부터 컴퓨터 프로그램들은 한글 처리를 운영체제에 맡기게 되었고, 확장 완성형은 사실상 표준이 됐다. 이후 표준 문자 전산 처리 방식이면서 완성형과 조합형을 모두 활용한 유니코드가 윈도XP부터 기본 문자 처리 방식으로 채택되어, 조합형-완성형 논쟁은 사라지게 됐다.

 

휴대폰 한글 삼국지

윈도로 인해 사라진 것처럼 보인 완성형 한글 표준이었지만, 당시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곳에서 살아남았다. 90년대 말부터 휴대폰이 보급되기 시작하고, 1998년부터 한글 문자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휴대폰이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휴대폰들은 사양이 낮았기에 완성형 한글을 탑재했다. 한글로 문자 메시지를 보낼 수 있게 되면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PC와는 달리 휴대폰은 자판이 숫자 패드로 구성돼 있어 입력에 어려움이 생긴 것이다.

사람들의 불편이 이어지자 새로운 입력 방식에 관한 연구가 다양하게 이뤄졌다. 예전과는 다르게 휴대전화 한글 자판은 일방적인 승자가 없었다. 구매한 휴대폰의 입력 방식을 이용자가 그대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삼성 휴대폰에 채택된 천지인 방식은 한글 창제 원리를 모음에 응용했다. 입력 키가 적고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 배우기가 쉽지만, 긴 문장을 입력하려면 타이핑을 여러 번 반복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LG전자 휴대폰에서 많이 쓰던 KT 나랏글(EZ 한글) 방식은 비교적 적은 입력으로 글을 쓸 수 있지만, 처음 접하는 사람은 사용하기 조금 어려웠다.

스카이 방식은 빠르게 입력할 수 있고 배우기가 어렵지 않았다. 다만 손가락을 많이 움직여야 해서 상대적으로 피곤했다.

 

스마트폰이 연 한글 춘추전국시대

휴대폰에서 끝날 줄 알았던 한글 입력은 스마트폰 시대를 맞아 다시 변했다. 먼저 컴퓨터 자판을 닮은 쿼티(qwerty) 기반의 두벌식 한글 자판이 일반적인 입력 형태가 되었다. 이후 천지인과 같은 기본 휴대폰의 방식도 사용자가 선택해 사용할 수 있는 편리한 환경이 구현됐다.

지금 스마트폰 한글 입력 방식은 한둘이 아니다. 스마트폰 키보드는 소프트웨어 방식이라, 자판 개발자가 생각하는 다양한 방식을 쉽게 구현할 수 있고, 사용자도 원하는 자판으로 쉽게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두벌식을 간략하게 만든 구글 단모음 한글 키보드, 자판을 드래그하는 방식으로 쓰는 딩굴 키보드 등도 많이 쓰이는 대안 한글 입력 방식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그어서 글자를 만든 스와이프 방식도 간혹 사용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컴퓨터는 로마자 알파벳 문화권에서 만들어진 하드웨어다, 이 때문에 비 로마자 알파벳 문화권에선 자국 글자를 이용하기 쉽지 않았다. 지금도 자국어를 변환 없이 그대로 입력하는 나라는 그리 많지 않다. 일본과 중국은 알파벳으로 발음을 입력하고 다시 자국어로 바꾸는 방법을 많이 쓴다. 하지만 각각의 문자는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기에 문화에 맞게 자판 기술은 진화하고 있다.

한글을 지키려는 노력과 그에 기반을 둔 논쟁은 첨예하게 대립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 과정은 현재 우리가 예전보다 편하게 한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데 크게 기여했다. 앞으로 VR 환경과 음성 인식이 중요해질 환경에서도 이런 노력은 계속 이어지리라 믿는다.

 

※이 칼럼은 해당 필진의 개인적 소견이며 삼성디스플레이 뉴스룸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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