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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부산국제영화제는 다른 일 때문에 좀 정신 없이 진행한 편이라 부대행사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 때문에 무료 VR 영화 상영 행사가 있다는 사실을 부산에 내려가서, 그것도 영화의 전당에 들어가서 알았다. 꽤 흥미로운 경험이라서 몇 편 더 챙겨봤으면 좋았을 텐데, 그게 잘 안됐다. 다른 기회가 있으면 좋을 텐데.

유진 정(Eugene Chung) 감독의 [아르덴즈 웨이크](Arden’s Wake: The Prologue, 2017)를 그곳에서 봤다. 아침 일찍 나와서 한 20, 30분쯤 줄을 섰던 것 같다. 열 대 정도의 컴퓨터에 VR 기기가 붙어 있고 영화의 러닝타임은 15분 정도. 분위기를 짐작하실 수 있으리라 믿는다. 같은 회사, 같은 감독이 만든 이전 영화인 [알루메트](ALLUMETTE, 2016)도 같은 곳에서 상영했는데, 시간이 없어 보지 못했다.

▲ 영화 [아르덴즈 웨이크] 이미지(출처 : PENROSE STUDIOS 페이스북)

영화는 미래 배경의 판타지이고 컴퓨터 그래픽 애니메이션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지구는 물에 잠겼다. 주인공은 프롤로그에서 어머니를 잃고 간신히 살아남은 여자 아이로 아버지와 함께 물 위로 삐죽 나와 있는 등대에 살고 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물에 내려갔다가 사고를 당하고 주인공은 아직 완성이 덜 된 잠수정을 타고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바다 밑으로 내려간다.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는 말해줄 수 없다. 일단 스포일러이고, 이 영화는 앞으로 계속 이어질 시리즈의 도입부라 결정적인 순간에 이야기가 끊기기 때문이다.

 

보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던 [아르덴즈 웨이크]

▲ 영화 [아르덴즈 웨이크] 이미지(출처 : PENROSE STUDIOS 페이스북)

이야기가 끊긴다고 아쉬울 건 없다. 아니, 아쉽기는 하다. 안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이야기만큼이나 이야기를 체험하는 방식이 중요하다.

[아르덴즈 웨이크]는 서서 보는 영화이다. 이건 관객이 보다 다양한 각도에서 영화를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영화는 머리를 들이밀고 들어갈 수도 있고 밖으로 나가 주인공에게 세레나데를 불러주는 남자아이가 탄 보트를 구경할 수 있다. 주인공이 잠수정을 탄 뒤에 영화는 엘리베이터처럼 수직으로 하강하는데, 그때부터는 바다가 관객 주변을 완전히 둘러싼다.

영화는 복잡한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시도하고 있다. 관객들의 시선을 스토리에 맞게 유도하면서 관객들의 시야가 닿을 수 있는 모든 부분이 스토리에 봉사할 수 있도록 계산된 것이다. 이것은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실사 VR 영화를 몇 편 보았는데, 아직까지는 [아르덴즈 웨이크]처럼 보는 즐거움을 느꼈던 적은 없었다. 많은 VR 영화들은 회전 가능한 상자에 갇혀 있는 것 같은 경험을 준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굳이 VR일 필요가 없다.

 

VR 영화 제작의 한계와 [아르덴즈 웨이크]의 가능성

▲영화 [아르덴즈 웨이크] 제작 과정(출처 : PENROSE STUDIOS 홈페이지)

전통적인 평면 영화는 논리적이고 그만큼이나 경제적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그리고 볼 필요가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다. 전에도 말했지만 원더우먼의 정면을 볼 수 있는데, 굳이 뒤로 돌아가 등을 보거나 주인공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볼 필요는 없다. 만약 그게 가능해진다면 영화는 불필요하게 음란해질 것이다. 굳이 볼 필요가 없는 것을 보는 사람들의 심리라는 것이 대부분 그렇다. [아르덴즈 웨이크]는 귀엽게 변형된 CG 캐릭터가 나오는 영화이고 불필요한 엿보기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지만 아주 멀쩡한 스토리를 가진 정상적인 VR 영화가 관객들에 의해 엿보기 포르노로 소비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 제니퍼 로렌스 주연의 영화 [마더!]의 한 장면(출처 : 롯데엔터테인먼트)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의 걱정과는 달리 VR 스토리텔링의 가능성은 아직 제한되어 있는 것 같다. 유진 정은 그 제한된 영역 안에서 어떤 스토리텔링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을 뿐이고. 살아있는 인형들이 뛰어오는 무대 위에 있는 것 같은 이 경험은 인상적이지만 이게 얼마나 새로운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연극에서 영화로의 전환은 혁명적이다. 영화는 연극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간과 공간을 다루는 예술이다. 하지만 VR 영화는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다. 영화와 연극 중간에 있다고 할까. 배우들을 따라다니면서 구경하는 연극 있지 않은가. 그걸 VR로 그럴싸하게 재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개봉된 대런 아로노프스키(Darren Aronofsky)의 [마더!](Mother!, 2017)도 VR 체험으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 경험은 인상적이더라도 쉽게 지루해지고 멀미와 짜증이 날 것이다. 일단 제니퍼 로렌스(Jennifer Lawrence) 캐릭터의 시야에 갇혀 제니퍼 로렌스의 얼굴을 볼 수 없을 테니까.

 

앞으로 등장할 VR 영화에 대한 기대

앞으로 유진 정과 같은 예술가들이 꾸준히 VR 영화의 가능성을 탐구할 것이고 난 여기에 대한 기대가 크다. 하지만 VR의 미래가 영화의 스토리텔링보다는 게임과 같은 보다 인터렉티브한 장르에 있다는 믿음을 바꿀 정도는 아니다. 전통적인 스토리텔링은 좁은 개울을 따라 흘러가는 것과 같다. VR을 통해 숲도 갈 수 있고 평원을 질주할 수 있고 하늘을 날 수도 있고 그냥 누워서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는데 감독이 시키는 대로 개울만 따라간다면 매체의 낭비가 아닐까.

▲가상 현실을 주제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제작하고 있는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의 예고편
(출처 : 워너 브러더스 픽쳐스 공식 유튜브)

기기 이야기를 해보자. 아직까지 내가 체험한 VR 기기의 해상도는 그렇게 좋은 편이 못 된다. 구닥다리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코앞에서 들여다보는 것 같달까. [스노 크래시(Snow Crash)](닐 스티븐슨 작, 1992)나 [레디 플레이어 원(Ready Player One)](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2018)의 독자가 기대하는, 고해상도의 이미지를 레이저로 직접 눈에 쏘아주는 기기는 아직 미래의 영역에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겁고 불편하고 갑갑하다. 곧 무선 장치가 나오겠지만 [아르덴즈 웨이크] 같은 작품을 보다보면 빙빙 돌고 앉았다 섰다를 반복하다가 기기와 컴퓨터를 연결한 전선에 얽혀 결박될 위험성도 있다. 게다가 난 같은 날 VR Movie Plus관(빙빙 돌아가는 의자에 앉아 여러 사람들이 같은 VR 콘텐츠를 구경하는 곳이다)에서 좀 난처한 경험을 했다. [아르덴즈 웨이크]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거기선 갑자기 얼굴에 땀이 차고 렌즈에 김이 서린다. 뿌연 화면 때문에 중간중간에 손가락으로 렌즈를 닦아주느라 영화에 전혀 집중하지 못했다.

다행이라면 그때 본 영화들이 [아르덴즈 웨이크]만큼 인상적이지 않아서 그렇게 아쉽지 않았던 것. 두 편 모두 일반적인 평면 영화의 1인칭 수법 (그러니까 [호수의 여인]이나 [하드코어 헨리] 같은 영화들 말이다)을 써서 만들어도 충분했을 작품들이었다. 그건 전통적인 평면 영화들이 VR이 특화한 것 같은 체험을 오래 전부터 커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칼럼은 해당 필진의 개인적 소견이며 삼성디스플레이 뉴스룸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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