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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 집에 8㎜(밀리미터) 필름 영사기와 카메라가 있었다. 그걸로 가족 영화도 찍어 보고 어디선가에서 딸려온 디즈니 만화 영화도 보고 그랬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디즈니 영화의 제목은 아직도 기억한다. [도널드 덕, 티티카카호에 가다](Donald Duck Visits Lake Titicaca, 1942).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남미 시장을 노리고 디즈니가 만든 여러 편의 애니메이션 영화 중 하나였다. 이게 어떻게 우리 집에 들어왔는지는 모르겠다. 무비 카메라나 필름 영사기를 살 때 딸려온 사은품이었을까?

▲1942년에 개봉한 영화 [도널드 덕, 티티카카호에 가다] 포스터(이미지 출처: www.imdb.com)

어두워진 방의 빈 벽에 디즈니 만화 영화가 떠오르던 마술적 순간을 기억한다. 필름 영사에는 확실히 텔레비전에서는 느낄 수 없는 마법의 느낌이 있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심지어 브라운관 텔레비전만 해도 지금의 텔레비전에선 느낄 수 없는 희미한 마법의 흔적이 있었다. 화질과 음질이 개선되고 디지털화가 진행되는 동안 깜빡거리는 영상이 가졌던 마법은 조금씩 사라지고 모든 게 일상화가 되는 것 같다. 여기엔 재미있는 규칙이 있다. 테크놀로지가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울수록 더 마법 같다. 내가 지금 원고를 쓸 때 사용하는 태블릿은 기술만 따진다면 거의 마법이지만, 필름을 투과한 빛이 스크린에 영사되는 원시적인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깜빡거리는 영상의 신비함은 만들어내지 못한다.

 

영화속 상영 기술,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어바웃 타임]까지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의 [마이너리티 리포트](Minority Report, 2002)에 그를 보여주는 물건이 있다. 톰 크루즈(Tom Cruise)가 연기하는 주인공 존 앤더튼의 아파트에 있는 디스플레이 기기인데 방 한가운데에 폭포수처럼 수증기 안개를 뿌리고 거기에 화면을 영사한다. 이 영화의 배경인 미래는 VR, 입체 영상 같은 게 일상화된 시대인데, 앤더튼은 아직도 거의 19세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구닥다리 기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그가 보는 과거의 홈 무비에 어떻게든 마법을 부여하고 싶었던 것 같다. 오래전에 실용성을 잃어버린 19세기 기술만큼 여기에 어울리는 도구가 있을까.

▲1950년에 개봉된 영화 [선셋 대로]에서 주인공들이 영사기를 통해 영화를 보는 모습 (이미지 출처: www.imdb.com)

제대로 된 영사 조건을 갖춘 집은 언제나 부럽다. [선셋 대로](Sunset Boulevard, 1950)에서 글로리아 스완슨(Gloria Swanson)이 연기한 무성영화 스타 노마 데스몬드는 자기 집에 완벽한 극장을 만들어놓고 자신이 출연했던 무성 영화를 트는데 어린 시절 나에겐 그게 사치의 극한으로 보였다. 심지어 데스몬드는 전용 영사기사도 있었다. 지금은 집사지만 왕년의 영화감독이었고 한때 남편이기도 했던 맥스이다.

최근 영화에서 부러웠던 가정용 영화관은 시간여행 로맨스 영화인 [어바웃 타임](About Time, 2013)에 있다. 주인공의 가족이 [셰인](Shane, 1953)을 집 벽에 영사해서 트는 장면이 나오는데, 내가 최근 본 야외상영 중 가장 조건이 좋았다. 대부분 야외상영 스크린은 공기를 부풀려 만든 것이라 완전한 평면을 이루지 못하고 16:9 화면비라 와이드스크린 영화를 상영할 때 위아래에 흐릿한 블랙바가 생기며 도시 환경이 만들어내는 불빛을 막지도 못하는데, 이 가족의 야외 영화관은 이 문제점들에서 자유로웠다. 이 가족 상영관은 처음부터 작정하고 만든 부산 영화의 전당 야외 상영관보다도 나았다.

[어바웃 타임]에선 전문 영사기사가 필요 없었을 것이다. 십중팔구 블루레이를 디지털 프로젝터로 틀었을 테니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영화의 필수 요소였던 필름 + 영사기의 조합은 지금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 다음 세계의 아이들은 움직이는 그림을 편집해 만든 이 예술매체를 왜 필름이라고 부르는지 궁금해할 것이다.

 

필름과 영사기 시대에서 LED 디스플레이 영화관 시대로

▲2011년 개봉작 영화 [슈퍼 8]에서 주인공이 8㎜ 필름으로 촬영을 하는 모습 (이미지 출처: www.imdb.com)

필름과 영사기가 진지하게 공존했던 시기는 80년대가 끝이었던 것 같다. J.J. 에이브럼스(J.J. Abrams)가 만든 스필버그 헌정영화 [슈퍼 에이트](Super 8, 2011)의 어린 주인공들은 8㎜ 필름으로 좀비 영화를 찍는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이미 가정 내에선 비디오테이프가 필름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었다. [슈퍼 에이트]의 배경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미시시피의 틴에이저들이 모여 [레이더스]의 모든 장면들을 그대로 재현한 팬 필름(원제 – 레이더스!: 사상 최고의 팬필름Raiders!: The Story of the Greatest Fan Film Ever Made, 2015)을 찍었는데 그때 그들이 사용한 것도 비디오테이프였다. 당연히 8㎜ 필름으론 그 긴 작업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2005년 개봉작 영화 [렌트]의 한 장면 (이미지 출처: www.imdb.com)

21세기에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필름을 쓴다면 이제 이유가 있어야 한다. 2005년에 나온 뮤지컬 영화 [렌트]( Rent, 2005)는 내가 별로 공감할 생각이 들지 않는 영화였다. 뉴욕 이스트 빌리지에 사는 가난한 예술가들이 주인공이었는데, 암만 봐도 이들은 자기네 가난을 패셔너블하게 소비하고 있는 게 뻔했다. 진짜로 가난했고 예술에 굶주렸다면 오래전에 브루클린이나 퀸즈로 갔겠지. 그중 가장 보기 싫었던 건 태엽을 감아 작동하는 볼렉스 16㎜로 길거리를 찍은 필름을 대충 붙여 상영하는 자칭 예술영화 감독이었다. 저 작업에 필름으로 찍어 영사한다는 행위 이외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왜 다들 그러는 것처럼 디지털로 가지 않는가.

디지털 기술의 발전 덕택에 빔 프로젝터로 가정용 영화관을 만드는 것이 가능해졌다. 난 아직도 프로젝터로 나만의 영화관을 만드는 걸 꿈꾼다. 하지만 꿈은 꿈일 뿐이고, 진짜로 경제적 문제와 부동산 문제가 해결되어 나만의 영화관을 꾸밀 수 있다고 해도 프로젝터는 쓰지 않을 것 같다. 생각해보면 그 주관적인 마법을 제외한다면 그리 장점이 없다. 해상도도, 콘트라스트도 약하고 관리하기도 불편하다. 왜곡되지 않은 정확한 직사각형 화면을 만드는 것도 보기보다 어렵다. 텔레비전은 점점 커지고 가벼워지고 있고 지금도 더 좋은 그림을 보여주고 있다. 당연히 텔레비전이다.

▲삼성이 만들어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점에 설치한 세계 최초의 LED 영화관 ‘Super S’ (이미지 출처: 삼성전자 뉴스룸)

아직까지 극장의 큰 스크린을 커버하려면 영사 방식이 주로 쓰인다. 하지만 이미 LED 디스플레이를 이용한 영화관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곧 극장이 커다란 비디오방이 되는 날이 다가올 것이다. 비디오 방이라고 말하니 끔찍하게 들리지만 그 미래의 비디오방은 지금의 영사된 화면보다 더 선명하고 밝고 무엇보다 왜곡되지 않은 화면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실버 스크린’이란 단어도 ‘필름’과 마찬가지로 원래의 의미에서 떨어져 나온 이상한 단어가 되지 않을까? 그때가 되면 영화의 마법을 간직하는 건 죽은 기술에서 떨어져 나온 그 유령과 같은 단어들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이 칼럼은 해당 필진의 개인적 소견이며 삼성디스플레이 뉴스룸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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