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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시작은 어디서부터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시네마토그라프(cinématographe)를 발명한 뤼미에르 형제가 아니라면 아마도 15,000년 전 스페인 북부 알타미라의 동굴벽에 벽화를 그린  구석기인들이라는 대답을 예상할 수 있다. 둘의 상관관계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둘의 특징을 따져보면 수긍이 된다. 영화는 회화와 다르게 이미지를 ‘상영’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감상한다. 동굴 속 벽화도 동굴 안의 울퉁불퉁한 벽면과 일렁이는(flickering) 불꽃으로 인해 벽면에 고착돼있던 그림들이 마치 움직이는 듯 보인다. 이렇듯 영화, 혹은 영상은 그것이 보여지는 방식과 기술적 매카니즘의 특성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영화 <파리 텍사스>의 빔 벤더스 감독은 “우리가 흑백 텔레비전을 보던 6-70년대 우리의 꿈도 흑백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듯 미디어를 통해 새로운 이미지 표현방식이 자라나며, 미디어 기술 자체의 변화는 그것이 가지는 문화적, 사회적 관계도 함께 발전한다. 그렇다면 예술이 이끌어 온 디스플레이는 어떤 것이고 디스플레이가 이끌어 온 예술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라프(출처 : 위키피디아)

우리에겐 너무도 자연스러운 백남준의 작품을 떠올려보자. 백남준의 작품은 텔레비전 수상기를 떼놓고는 상상할 수 없다. 모니터에 자석을 대며 추상적인 이미지를 연출하거나 모니터를 껴안고 있는 백남준의 사진을 많이 접했을 것이다. 심지어 오랜 동료인 아베 수야(Abe Shuya)와 함께 <아베 신디사이저>(1969)를 만들어 디스플레이 매카니즘 틈새에 개입(hacking)해 자신만의 이미지를 구축한다. 형식은 올드하지만 어쩌면 가장 혁신적인 작업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모니터가 노후되어가면서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마다 모니터를 수급하기 어려워 심각한 걱정을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백남준의 모니터는 그 자체로 작품의 일부가 되었고 백남준 작품을 대표하고 있다.

백남준의 ‘백-아베 비디오 신디사이저’(1969년)(http://njp.ggcf.kr/archives/artwork/n018)

▲ 백남준 작 ‘전자 초고속도로: 미국 대륙 Electronic Superhighway: Continental U.S.’(1995) (출처 : 위키피디아)

디스플레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또 한 명의 작가로 빌 비올라(Bill Viola)를 꼽을 수 있다. 빌 비올라의 작업에서 이미지만큼이나 디스플레이는 중요한 형식이 된다. 빌 비올라는 오래된 프레스코화 벽화나 화려한 액자로 왕궁의 살롱 벽을 채웠던 서양 미술사의 이미지 재현방식을 미디어로 재해석하고자 했다. 그의 작업 영상 속 배우들(빌 비올라는 자신의 작업 속 배우들을 위한 극단을 가지고 있다)은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내며 마치 박제된 것처럼 디스플레이의 틀 안에서 다양한 영적 감성을 연기하고 있다.

▲ Bill viola ‘Tristan’s Ascension’ (teaser)

최근의 대형화되고 고해상도를 추구하는 디스플레이 기술의 발전과는 별개로 디스플레이의 존재감은 우리에게 예전만큼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사라져가고 있다. 그러나 디스플레이는 우리의 망막을 파고들어 우리 의식 전면에 자리 잡고 있다. 지하철 안에서 작은 디스플레이에 시선을 가까이 고정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자. 유사 이래 디스플레이가 인간과 이렇게 가까웠던 적이 있었는가?

얼마 전 색재현도와 해상도가 자연과 거의 차이가 없다는 삼성 모니터 광고를 봤다. 가상과 실재의 경계가 사라진다는 아니 실재를 대체할 것이라는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나 빌렘 플루서(Vilém Flusser)와 같은 미디어 이론가들이 말한 ‘시뮬라크럼(simulacrum)’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방가르드 작가인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ite)의 작품을 참고한 것일까? 캔버스가 오늘날의 디스플레이처럼 가상과 실재의 경계를 없애고 확장시킬 것이라는 이 초현실주의 작가의 멜랑꼴리(melancholy)한 상상은 그대로 시대를 넘어 뿌리깊은 메시지를 보여준다.

사람들은 과거에 HD디스플레이가 일본에서 급격히 발전한 이유를, 디스플레이를 가까이서 봐야하는 좁은 일본식 건축 구조에서 찾았다고 한다. 무한히 확장되고 확대되어 가는 디스플레이와는 반대로 VR시대를 맞아 HMD이라는 작은 동굴에서 우리는 전례없이 또 다른 디스플레이를 눈앞에 펼쳐 놓고 있다. 이런 디스플레이의 또 다른 진화가 새로운 하이퍼리얼(hyper reality)의 시대에서 어떤 예술적 상상들을 어떻게 담아 낼 지 두렵지만 동시에 기대된다.

※이 칼럼은 해당 필진의 개인적 소견이며 삼성디스플레이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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