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디스플레이는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만난 두 사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바로 한국의 폴포츠라고 불리우는 성악가 최성봉씨와 패션디자이너로 성공한 최범석씨입니다.

역경을 이겨낸 그들의 인생 이야기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음악으로 소통하는 한국의 폴포츠, 성악가 최성봉씨

저는 다섯 살 때 고아원에서 나와 길거리를 전전하며 집도 없이 10년 정도 살았답니다. 삶에 여유가 없으니 오늘 죽어도 내일 죽어도 그만인 삶이었죠. 생계를 위해 종일 껌을 팔고 날이 밝을 때쯤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잠을 청하기를 반복. 그러던 어느 날, 껌을 팔러 간 나이트클럽에서 우연히 성악을 듣게 됐어요. 늘 시끄러운 사람들이 북적이는 그곳에서 조용히 울려 퍼지는 노래는 마치 제게 위로를 건네는 것처럼 마음에 와 닿았어요. 순간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온몸이 떨리고 소름이 돋았죠.

<출처> CJ E&M, 아시아투데이(2012.3.16)

 

그렇게 성악에 매료된 저는 무작정 레슨 학원을 찾아가 제자로 받아달라고 했고, 그때 만난 분이 바로 지금의 멘토, 성악가 박정소 선생님이에요. 저의 안타까운 사정을 듣고 학생으로 받아준 거죠. “야, 인마” 혹은 “거지새끼야!”로 불리다 성악을 만나고부터 다른 인생을 살게 된 저. 막상 시작하고도 학비 마련 때문에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선생님의 권유로 TV 오디션에 출연하게 됐고, 제 이야기는 전 세계로 알려지면서 한국의 ‘폴포츠’라는 별명까지 얻게 됐습니다. 고아로 버려진 뒤 다섯 살 때부터 길거리에서 살았고, 친구가 없어 늘 혼자였던, 누구에게 칭찬이나 따뜻한 말보다 욕을 듣는 것이 더 익숙했던 제가 누군가에게 관심을 받고 새 희망을 찾게 된 거예요.

<출처> CJ E&M (http://gottalent2.interest.me/Index/17/Board/View?rcnt=1&b_seq=2>

 

더 놀라운 건 절망에 빠져 허덕이던 제가 다른 사람에게도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었어요. 대장암 말기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분이 저에게 ‘이런 아이도 살았는데 나는 신세한탄만 했구나’라며 삶의 용기와 희망을 찾게 됐다고 손을 꼭 잡아주신 적이 있는데 그 순간, 심장이 뜨거워짐을 느꼈고, ‘받은 것보다 더 많은 걸 돌려드리자’며 제 자신과 굳게 약속했죠.

솔직히 말씀드리면 여전히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것이 두렵고 트라우마도 남아 있어서 계속 극복하려고 노력 중이에요. 우리가 사는 인생은 단 한 번뿐이잖아요. 실연, 고통, 아픔은 과정에 불과해요.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도 있듯 어차피 다 지나가는 일이니 고통에 얽매이지 말고 희망을 노래하세요. 그리고 스스로를 토닥여주세요. 매일을 치열한 삶 속에 살아가는 내 자신을 위해 ‘수고했다’고 말해주세요.

행복은 자신이 마음먹기에 달려 있잖아요. 만일 제가 삶을 비관하고 삶을 포기했다면 성악을 처음 들었던 그날도 아무 감흥 없이 지나쳤을 거예요. 하지만 제게는 일상의 모든 것이 환상이었기 때문에 성악을 통해 그 환상을 꿈꾼 거죠. 음악으로 인해 세상에 나올 수 있었고, 음악으로 인해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됐으니, 이제 보답하는 마음으로 음악을 하려 해요.

 ‘오늘은 또 누구에게 희망을 주게 될까’ 생각하며 늘 설레는 마음으로 노래를 부르는 거죠. 이제 제 모든 삶, 음악을 통해 여러분의 닫힌 마음을 살짝 두드리겠습니다.

 

설렘과 희망으로 삶을 재단하다. 패션 디자이너 최범석

4형제 중 셋째인 저는 늘 형들에게 옷을 물려 입었는데 그게 너무 싫었어요. 가난한 집 형편에 옷을 사달라고 조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였을까요. 옷에 대한 애착이 매우 강했던 저는 결국, 고3 졸업을 앞두고 종자돈 100만 원으로 홍대 앞 노점에서 옷 장사를 시작했죠.

그렇게 옷 장사로 전전하다 동대문 원단시장에 취직해 현장의 생리를 몸으로 익혔어요. 조금씩 제 자리를 만들어가다 보니 남들과 똑같은 옷을 파는 게 싫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정식으로 배우지는 않았지만 저만의 옷을 디자인하기 시작했어요.

첫 디자인은 ‘너무 튄다’는 이유에서 무참히 실패. 원인을 찾으려고 ‘원단 삼촌’ ‘패턴 이모’들을 찾아가 바닥부터 배웠죠. 그 노력 끝에 제가 만든 옷은 대박을 터뜨렸어요. 1만 원짜리 옷으로 무려 한 달 반 동안 1억 6,000만 원을 벌었으니, 상상이 가나요?

그렇게 승승장구, 저만의 브랜드를 만들어내면서 동대문에서 잘나가는 디자이너가 된 저는 패션디자이너를 꿈꾸며 패션계의 문을 두드렸어요. 하지만 또 다시 위기는 찾아왔죠. 중졸 디자이너, 동대문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다니며 패션계의 입문을 가로막은 거죠. ‘서울패션위크’에 처음 도전할 때 수도 없이 퇴짜를 맞았고, 학력과 경력에서 계속 밀리게 됐어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찾아갔더니 결국 보다 못한 박윤수 디자이너 선생님께서 일주일에 10벌을 제작해오라고 제게 미션을 주더라고요.

옷 만드는 거 하나는 자신 있던 터라 문제 될 건 없다고 생각했어요. 약속대로 일주일 만에 10벌을 제작해서 찾아갔고 결국 무대를 허락해주셨죠. 그렇게 저는 패션디자이너의 길을 걷게 됐어요.

그렇다고 지금은 수월하냐? 전혀 그렇지 않아요. 트렌드에 민감한 패션계는 언제나 전쟁터 같은 곳이에요. 아마 몇몇 사람은 제가 패션에 미쳐 있는 모습을 보고 ‘저놈, 참 독하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제가 꿈꾸던 것을 이루기 위해선 이거 아니면 죽는 다는 각오로 열심히 달려야 했죠. 그리고 지금도 저의 꿈은 끝나지 않았어요.

<출처> 최범석 홈페이지 (http://www.generalidea.co.kr/history/history.html)

 

여기서 멈춘다면 인생이 너무 재미없지 않을까요?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기지 못하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듯 계속 꿈을 좇으며 또 다른 희망을 찾고 싶어요. 새로운 것에 도전할 때가 가장 설레는 순간이니까요.

여러분도 꿈을 즐기던 그 순간의 열정을 떠올리며 올해는 각자의 위치에서 삶을 잘 재단하는 사람이 돼보는 건 어떨까요?


 

여러분 삶이 힘들때, 절망의 끝에 있다해도 희망은 있는 법!!

모두 힘내시고 행복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