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또 봐도 알쏭달쏭한 디스플레이 기술들. 삼성디스플레이 블로그가 다양한 디스플레이 기술을 알기 쉽게 설명해 드리고자 '디스플레이 톺아보기' 코너 연재를 시작합니다.

* 톺아보다 : [동사] 샅샅이 톺아(더듬어 뒤지면서 찾아) 나가면서 살피다.

 

본 코너를 통해 디스플레이 기술의 기원부터 미래 디스플레이 기술까지, 최대한 어렵지 않으면서도 정확하게 짚어 본다는 목표로 차근차근 포스팅하겠습니다. 앞으로 많은 기대를 부탁드리며, '디스플레이 톺아보기' 그 첫 번째 내용은 디스플레이 기술의 기원과 역사를 다루는 포스팅으로 시작하겠습니다.

 

디스플레이(Display)란?

'디스플레이'의 어원은 라틴어인 Displico 혹은 Displicare로 그 의미는 '보이다', '펼치다', '진열하다' 등입니다. 가장 흔히 쓰이는 의미는 '전시 및 진열'이지만, 전자공학에서 뜻하는 디스플레이는 '표시장치'라는 뜻으로서 각종 전자기기의 다양한 정보를 전달하는 출력장치를 의미합니다. 보여주어야 할 '정보'가 '디스플레이 장치'를 거쳐 우리 눈을 통해 인지되는 것이죠.

TV, 스마트폰, 모니터, 태블릿. 요즘같이 디지털화된 세상에서 디스플레이가 없다면 불편을 넘어 문명의 존속 자체가 흔들릴 수 도 있을 만큼, 그 중요성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에 이렇게 중요한 디스플레이의 기원을 시작으로 그 역사적 흐름을 알아보겠습니다.

 

최초의 디스플레이 :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벽화

알타미라 동굴벽화는 구석기 시대(기원전 약 15,000년 경)의 유적으로 야생 동물의 뼈와 사람들의 손으로 그린 암벽화입니다. 예술계에서는 이 벽화를 인류 최초의 회화로 보고, 역사학자들은 성공적인 사냥 등을 기원하기 위한 종교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디스플레이 관점에서 본다면 이 벽화는 인류 최초의 디스플레이 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지 정보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기능으로서 회화의 첫 등장이기 때문입니다. 일만년이 넘는 긴 시간을 지나 현대를 살고있는 우리에게 당시의 생활상에 대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서 가장 오래된 인류의 디스플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식 전달의 혁명 : 파피루스, 종이의 발명

인류는 지식의 전달과 축적을 통해 문명을 발전시켜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기록과 보관은 무척 중요한 요소였고, 석판이나 점토판과 같이 기록과 관리가 어려운 방법에서 탈피해, 파피루스와 양피지를 활용하는데 이어 현재까지도 유용하게 사용중인 종이를 발명하기에 이릅니다. 특히 종이의 발명은 지식의 폭발적 증가와 확산을 가능하게 한 지식 혁명이었고, 문명은 발전에 가속 페달을 달았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다 : 사진의 발명

인류는 문자와 그림을 종이에 적고 그려 넣을 수는 있었지만, 자연이나 사물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담아내는 기술은 아직 없었습니다. 이를 가장 유사하게 표현하는 방법은 리얼리즘 기법의 회화 정도였죠. 하지만 1826년에 프랑스인 이었던 조제프 니세포르 니에프스(Joseph Nicéphore Niépce)는 금속판 위에 상을 정착해 세계 최초로 사진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합니다. 아래 사진이 창밖을 바라보며 8시간 노출을 통해 얻은 최초의 사진입니다.

니에프스의 발명에 이어 1831년에 루이 다게르(L.J.M.Daguerre)는 보다 진일보한 사진술 발명을 이어나갔고, 1837년에는 촬영, 현상, 정착의 프로세스를 완성해 화상을 영구적으로 고정시키는 방법을 고안해 이 프로세스를 다게레오타입(Daguerreotype)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이 후에 사진기술은 급격히 발전해, 필름카메라가 대중화되었으며, 현재는 디지털카메라 혹은 휴대폰 카메라를 통해 사진 촬영은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디스플레이로서 사진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발명이었습니다. 초기에 사진술은 과학적 측면에서 주로 다루어졌는데, 그 시대의 많은 초상화가들은 순식간에 자신들을 대체해 버릴 사진기술에 상당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고 하며, 프랑스의 역사화가인 '폴 들라로슈(Paul De La Roche)'는 "회화는 죽었다"라고 까지 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사진과 회화가 상호 보완적이고 경쟁적으로 발전해 왔고 대량 출판 기술로도 이어졌다고 하니, '표현 방식' 즉 '디스플레이 방식'의 변화가 사회와 예술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위대한 기술로 인정받는 사진 기술이었지만, 사진은 멈춰있는 장면을 보여줄 뿐, 움직이는 표현은 프락시노스코프(Praxinoscope) 같은 형태로만 존재했습니다.

 

움직임을 담아내다 : 영사기(映寫機, Movie Projector)의 발명

1895년 12월 29일, 프랑스 파리의 한 카페에 모인 수십명의 관객들은 조명이 꺼지자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다름아닌, 122년 전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Nicholas Lumière, Jean Lumière)가 만든 세계 최초의 영화 '기차의 도착'을 본 관객들의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움직이는 영상을 처음 본 관객들이 영화 속에서 기차가 앞으로 다가오는 화면을 보자, 실제로 착각해 도망을 쳤던 유명한 일화입니다.

영사기는 1889년에 미국의 에디슨이 최초의 영사기인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를 발명했습니다. 키네토스코프는 지금처럼 커다란 화면으로 영화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작은 구멍을 통해 한 명씩 들여다보아야 하는 방식이었죠. 하지만 움직이는 사진, 즉 영상을 처음 접한 이들은 이것을 들여다보는 것 조차 대단히 놀라운 구경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여러사람이 볼 수 있는 방식의 영사기가 동시다발적으로 발명되기 시작했고, 가장 널리 알려진 영사기로는 앞서 영화 '기차의 도착'을 제작한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Cinématographe)'입니다. 아래 그림과 같은 시네마토그래프의 등장을 통해 이후 본격적인 대중 영화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20세기에 이르러 우리가 현재 접하는 디스플레이 장치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1897년 독일의 K.F 브라운(Karl Ferdinand Braun)이 음극선관(陰極線管, Cathode-Ray Tube, 약자 CRT)을 개발하면서 전자 디스플레이의 혁신이 또 한번 이루어집니다. Part.2에서는 음극선관을 비롯한 현대적 디스플레이의 등장과 원리, 그리고 미래 디스플레이 전망에 대해 포스팅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