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서울 신촌에 있는 독수리 다방에서는 온라인 동호회 오프라인 모임이 자주 열렸다. 그곳에 나가 친구를 기다리다 보면, 옆자리에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들려올 때가 많았다. 특히 리니지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같은 온라인 MMORPG 게임 사용자들이 나누는 대화가 기억에 남는다. 그 사람들은 게임 속에서 겪은 일을 마치 현실에서 일어난 일처럼 얘기하고 있었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게 왜 신기해? 하고 볼 사람이 많다. 게임이나 인터넷에서 겪은 건 진짜 경험이 아니라고 말하던 시대는 이제 지났다.


메타버스의 등장

인터넷 공간에서 아바타 모습으로 사람을 만나는 건 이제 익숙하다. 음성 채팅까지 나누면 실감은 배가 된다. 예전에 피시방에서 친구들과 함께 게임을 할 때나 느낄 수 있었던 기분을, 이젠 내 방에 앉아서 느낀다. 가상과 현실이 다르지 않다면, 아예 가상에서 살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상상을 대놓고 펼친 SF 소설이 닐 스티븐슨이 쓴 ‘스노 크래시(1992)’다. 모든 권력이 민영화된 세상에서, 시민들은 진짜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는 가상 현실 공간 ‘메타버스’를 ‘아바타’ 모습으로 이용한다.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보는 것처럼 이제는 흔한 소재가 되었지만, 1992년에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나오자마자 많은 개발자에게 영감을 줬고, 이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게임이 연이어 나오게 된다. 2003년 출시된 세컨드 라이프는 대놓고 스노 크래시에서 영향을 받아 만들었다고 말하는 서비스다. 린든 랩에서 제작한 3D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로, 이용자는 이 안에서 친구를 사귀고 연애를 하고 사업을 할 수 있다. 또한 린든 달러라는 가상 화폐가 있어서, 가상 아이템을 사거나 팔 수도 있었다.

세컨드 라이프가 인기를 끌면서 떠올랐던 메타버스는 세컨드 라이프와 함께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져갔다. 그렇게 잊혀졌던 단어인 메타버스가, 코로나19 때문에 다시 이슈가 되었다. 환경적 요소로 인해 사람들이 온라인 공간에서 회의하고, 공부하고, 노는 시대가 와버렸기 때문이다.  방아쇠를 당긴 사람은 엔비디아 CEO 젠슨 황이다. 엔비디아 게임 개발자 행사인 GTC에서, 옴니버스라는 VR 협업 도구를 소개하며 메타버스를 말했다. 이 도구는 여럿이 가상 현실에서 함께 모여 일할 수 있고 소설과 영화에 나온 메타버스와 같은 장소가 될 거라고. 그리고 메타버스란 단어의 인기가 화제가 되었다.


그래서 메타버스가 뭘까?

그렇다면 메타버스가 대체 뭘까? ‘~을 넘어서(beyond)’라는 뜻을 가진 meta와 우주, 또는 세계를 뜻하는 universe를 합쳐서 만든 단어지만, 그걸로 실제 쓰이는 뜻을 설명할 수는 없다. 누군가는 ‘생활형 가상 세계’라고도 하고, 다른 누군가는 ‘아바타를 이용해 사회, 경제, 문화적 활동을 하는 가상 세계’라고 말하기도 한다. 스스로 메타버스라고 주장하는 도구나 플랫폼, 서비스가 보여주는 모습도 저마다 다르다.

엔비디아(NVIDIA)가 말하는 메타버스는 서로 다른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온라인으로 실시간 협업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 및 협업 플랫폼이다. 마이크로 소프트와 페이스북이 말하는 메타버스는 혼합/가상현실 기기를 기반으로 한 놀이나 회의 플랫폼이다. 엔터테인먼트 회사가 말하는 메타버스는 부캐로 온라인 아바타를 만들겠다는 말이다. 포트나이트나 로블록스처럼 메타버스 대표 사례로 소개되는 게임은 게임 안에서 부가적으로 콘서트나 사교 모임 같은 활동이 이뤄지는 걸 말한다. 제페토는 아바타를 만들어 참여하는 일종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다.

이쯤 되면 뭐가 뭔지 혼란스럽지만, 같은 점은 하나다. 가상 세계에서 현실에서 하는 일을 하는 것. 기존 가상 공간이 현실에서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판타지 공간이었다면, 메타버스는 여럿이 현실에서 하던 일-업무, 공부, 사교, 상거래 등을 하는 가상 현실 공간이다. 사람들이 거기서 생활하기 시작하면, 사업 기회도 생긴다. 오래전 싸이월드 도토리에서 배웠던 것처럼, 거기서만 팔리는 아이템을 제작할 수도 있다. 인터넷 쇼핑과 마찬가지로 실제 물건을 사고팔거나 홍보하는 공간으로 쓰이지 말란 법도 없다.

▲래퍼 트래비스 스캇의 게임 포트나이트 가상 콘서트 (출처: Travis Scott 유튜브 채널)

가상과 현실 세계는 그렇게 영향을 주고받는다. 게임 포트나이트는 래퍼 트래비스 스캇 콘서트로 인지도를 높였지만, 트래비스 스캇도 게임 내 아이템 출시로 이익을 얻었다. 더불어 첫 포트나이트 콘서트 후, 소셜 미디어 팔로워가 140만 명 늘었으며, 티켓 수요가 419% 증가했다고 한다. 일본에선 VRChat 앱을 이용해 ‘크로스 마켓2’라는 가상 이벤트가 열렸다. 가상 공간에서 쓸 수 있는 아바타와 아바타용 액세서리 같은 다양한 3D 아이템을 사고파는 전시로, 내 아바타를 가지고 돌아다니며 구경하거나 거래하고, 다른 참가자와 대화할 수도 있다. 이렇게 가상을 현실로/현실을 가상으로 양쪽 세계를 합치려는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굳이 세컨드 라이프까지 들먹거리지 않아도, 그동안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온라인 게임은 여럿 있었다. 고전 명작 울티마 온라인이나, 판타지 라이프를 내세웠던 마비노기 같은 게임이다. 다만 게임 아이템 현금 거래 등을 빼면, 가상 공간 속 활동은 일이 아닌 오락으로만 남았다. 현재 거대 IT 기업들이 메타버스를 이야기하는 건, 코로나19로 인해 세상이 바뀐 김에 이런 가상 공간을 실제 업무와 회의, 공부, 사교 행동이 이뤄지는 장소로 바꾸고 싶다는 뜻이다. 쓰면 재미있는 곳에서, 꼭 써야 하는 장소로. 원격으로 일하거나 생활해도 불편하지 않도록 방법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메타버스, 디스플레이와 함께 하는 삶

그렇다면 앞으로 메타버스는 우리 삶에서 어떻게 활용될까? 먼저 현실을 복사한 세계를 구축하려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구글 스트리트뷰에서 거리 사진을 찍어 보여주는 것처럼, 현실 세계를 3D 모델로 찍어서 재현한다. 이렇게 되면 메타버스에서도 현실과 비슷한 거리에서 생활할 수도 있다. 여기에 이런저런 정보를 기록해, 다시 현실 거리에 덧씌울 수도 있다. 덧씌운 정보는 AR 클라우드에 기록되어, AR 기기를 가진 다른 사람과 함께 쓰게 된다. 증강/혼합 현실 기기 개발도 활발하다.

미래는 디스플레이가 사라진 세계 어쩌면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너무 디지털 정보를 쓰기 쉬워져서, 컴퓨터와 TV, 스마트폰이 필요 없는 세계가 등장할지도 모르겠다고. 그렇지 않다. 반대로, 잠자는 시간을 빼면 디스플레이와 함께 사는 거라 보는 게 맞다.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는 것처럼, 가상현실 기기 디스플레이를 통해 세상을 보는 생활이 되기 때문이다. 좀 더 편하게 쓸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거지 디지털 정보가 필요한 이상 디스플레이가 사라지진 않는다. 메타버스가 점점 일상적으로 쓰일수록, 우린 더 나은 디스플레이를 찾게 될 것이다.

다만 메타버스가 계속 인기를 얻으리라 속단하지는 말자. 어떤 기술이든 결국 우리 시간을 써야 하는 문제고 주어진 시간은 정해져 있다. 사람은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그걸 쓰지 않는다. 재미있거나 유익하거나 배움이라도 있어야 한다. 절대로 더 편해야 한다. 귀찮게 AR 안경을 쓰느니 그냥 컴퓨터를 쓰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도 얼굴을 봐야 일도 연애도 할 수 있지’라고 말할 사람도 있다. 좀 더 편하게 세상을 살기 위해 필요할 때 쓸 방법이 하나 더 생겼다고 생각하면 충분하다.


※ 이 칼럼은 해당 필진의 개인적 소견이며 삼성디스플레이 뉴스룸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