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기운이 완연하던 5월 초, 마법 같은 소식이 들렸다. KAIST의 연구팀이 입을 수 있는 OLED 디스플레이를 개발했다는 뉴스였다. 30 마이크로미터 굵기의 미세 섬유 속에 OLED 소자를 넣고 코팅하여 평면 디스플레이와 같은 수준의 전자 섬유를 개발한 것이다. 기존의 실험적인 샘플들보다 훨씬 발전한 성능을 보여주었으며, 높은 휘도와 낮은 전력 소비율로 실용화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는 평가를 받고, 인지도 높은 국제 저널에도 실렸다.

입는 디스플레이(wearable display)는 입는 로봇(wearable robots)처럼 인간의 능력과 상상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장치다. 카멜레온처럼 환경에 따라 옷 색깔을 쉽게 바꿀 수 있다면, 기분에 따라 스타일을 자주 변화시킬 수 있다면 우리의 생활 자체가 달라질 것이다. 오래전 <해리 포터>의 투명 망토 기술이 화제가 되었던 것처럼, 그럴듯하게 상상해온 아이디어는 아주 늦을 수는 있지만 대부분 현실화되었다. 하늘을 날며 외계의 적을 무찌르는 로봇이 아직 상상 속에 남은 것처럼, 옷 전체를 시시각각 변화하는 디스플레이로 사용하는 기술도 당분간은 마법 같은 상상에 머물 것이다.


마법과 같은 컬러 세상

▲ 1954년 미국에서 출시된 RCA TV는 둥근 튜브 형태의 화면에 컬러 방송을 보여준 최초의 제품이었다 (출처: 위키피디아)

컬러는 마법과 같다. 지금 우리나라의 50대 이상 계층은 1981년 컬러 방송이 처음 시작되던 새해 첫날을 기억한다. 한적한 농촌과 도서에 전기가 들어간 지 채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컬러 방송이 시작되었으니, 무척 놀라운 경험이었다고들 말한다. 전기가 없던 시절은 너무도 어두웠다. 집마다 켜 놓은 남포등과 촛불이 전부였다. 밝은 달이 뜨지 않은 날에는 칠흑같이 어두워서 산 고개를 넘기 힘들었는데, 간혹 어린이를 잡아먹는 여우 이야기를 믿을 수 있을 만큼 암흑의 시절이었다. 어둠이 깊으면 밝음이 잘 보인다. 도심을 벗어나면 어디서든 밤마다 쏟아지는 별빛을 볼 수 있었다. 별빛이 흔들리듯 보이는 물리적 사실을 배우기도 전에 밤하늘에서 자연스레 볼 수 있었다. 우리 은하를 가로지르는 횡단면, 즉 은하수가 영어로 왜 ‘밀키웨이(milky way)’인지도 맑은 밤에는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어둡던 세상에 갑자기 쨍한 컬러 방송이 나타났으니 다들 놀라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비현실적이던 이미지가 현실이 되는 경험이었고, 흑백의 세상에서 컬러는 마법과 같았다.


현실의 컬러를 재현하기 위한 노력

상식적으로 볼 때 현실의 색을 그대로 재현하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구석기 시대 동굴벽화에 들소를 그리던 원시 인류도 소 특유의 색상과 가죽 질감을 재현하기 위해 사방으로 안료를 구하러 다녔을 것이다. 그래서 오렌지빛 갈색의 안료로 칠한 들소 그림이 지금도 그럴듯하게 실제의 소를 재현하고 있다. 빨간 사과나 노란 참외가 대상을 정의하는 표상으로 굳어진 것처럼, 컬러는 세상을 인식하는 척도의 기능도 담당했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고정관념처럼 사물의 ‘고유색(local color)’ 개념도 생겨났다. 인간의 시각체계도 본능적으로 색상의 오류를 검출하여 이상한 컬러 정보는 버리고 사물의 고유색으로 인식하게끔 진화했다. 즉, 믿는 대로 보게 된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도 도식적인 색상 체계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다양한 색상의 스펙트럼과 명암의 계조를 구현했다. 형태적으로도 사실적인 인체와 비례, 원근법을 활용하여 실물처럼 보이도록 노력했다. 사실적인 형태에 사실적인 색채는 그림 속 장면이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건처럼 보이는 효과를 만들어냈다. 재현의 기술이다. 현실의 컬러를 더 현실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은 화가의 기술이자 능력의 증명이었다. 당시 화가들은 사실처럼 재현하기 위해 그림에 엄청난 공을 들이며 노력했다. 비교적 색채를 절제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모나리자>의 얼굴을 그릴 때 단위 면적당 평균 50회 이상 붓질했다는 분석이 있을 정도였다. <모나리자>의 오묘한 미소는 수십 개의 레이어가 쌓인 결과이다. 마법도 노력의 산물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옅은 갈색톤의 인물과 푸른 톤의 배경은 윤곽을 흐릿하게 표현하는 스푸마토(sfumato) 기법의 영향으로 신비롭게 보인다. 디지털 영상의 HDR처럼 밝음과 어두움의 단계와 대비를 깊게 강조하는 명암대조법(chiaroscuro)도 이 작품의 중요한 특징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컬러 영상의 마법

20세기 초 흑백 영화가 전 세계로 보급되던 시기에도 사람들은 컬러를 욕망했다. 흑백의 사진과 영화는 이야기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는 있지만 다채로운 감성이 빠져 있었다. 스릴러 영화에서도 빨간 피인지 짙은 회색의 물감인지 구분이 안 되었으니 조금 답답했을 것이다. 그래서 흑백의 필름에 채색을 시작했다. 컬러 필름의 영화를 제작하고 상영할 준비가 안 되었으니 그 대안으로 나온 것이 채색 필름 기법이었다. 흑백 사진에 채색하던 유행이 영화 필름으로 확장된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점점 길어지면서 수많은 필름에 채색하는 일이 감당하기 힘든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다.

수공 노동의 대안으로 흑백 필름에 특정한 컬러 빛을 입히는 ‘틴팅(tinting)’이나 ‘토닝(toning)’ 기술이 잠시 유행했다. 1918년 미국에서 빨강과 녹색의 2색으로 필름에 색을 입힐 수 있는 ‘테크니컬러(Technicolor)’ 기술이 적용되면서 손으로 채색하던 노동은 곧 사라졌다. 1930년대부터 50년대까지 컬러 영화를 지배했던 테크니컬러 기법은 획기적이었지만, 삼원색이 아니기 때문에 조금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파란색이 없는 세상은 사실적이라기보다는 가상의 세상처럼 몽환적으로 보였다. 1932년에는 삼원색을 구현하는 테크니컬러 기술도 개발되었는데, 삼원색을 각각의 카메라로 촬영하여 나중에 하나로 합성하는 거추장스러운 방식이었다.

▲1925년 제작된 테크니컬러 방식의 영화 <오페라의 유령>은 삼원색 중 파란색이 빠진 빨간색과 녹색의 조합으로 컬러 이미지를 제시했는데 유령의 빨간 의상이 강렬하게 다가오지만 파란색이 결여된 영향으로 재현의 사실성이 약화되었다 (출처: 위키피디아)

1950년대 이스트만 코닥(Eastman Kodak)에서 하나의 필름에 삼원색을 기록하는 신기술을 발표하면서 비로소 현대적인 컬러 영화의 전통이 확립될 수 있었다. 컬러 방송에 시기적으로 뒤진 컬러 영화는 대형 스크린에서 스펙터클 장면을 경험하는 미디어로 굳어졌다. 컬러 영상의 재현은 신비한 마법이 아니라 치열한 경쟁의 산물이었다.

영상 엔터테인먼트의 유일한 기준이었던 영화를 제친 컬러 방송은 이미 질주하고 있었다. 1938년 영국의 존 로지 베어드(John Logie Baird)가 런던의 한 극장에서 120선의 컬러 이미지를 전자총으로 쏘는 시연을 벌인 것이 컬러 방송의 출발점이었다. 이듬해 미국의 CBS 방송국에서 연속적인 컬러 영상을 구현하는 체계를 처음 발명하고, 1940년부터 컬러 TV를 출시했다. 이때는 삼원색의 컬러 휠(color wheel)을 빠르게 돌려 투사되는 빛이 천연색처럼 보이게 만드는 기계적인 기술이었는데, 보완을 거듭하여 1953년에는 미국에서 컬러 방송이 공식화되었다.

당시 강대국은 저마다의 방송 표준을 제정하고 세계 각국을 자기 체계에 편입하도록 회유하기도 했다. 미국의 영향력이 컸던 동아시아는 미국의 NTSC 방송 체계에 편입되었다. 아시아에서는 1960년에 일본이, 1966년에는 필리핀이 NTSC 체계의 컬러 방송을 처음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1970년대에 이미 컬러 방송 기술을 확보하고 컬러 TV도 수출하고 있었는데, 여러가지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1980년 컬러 방송 송출을 시작했다.


점점 확장되는 디지털 컬러의 세계

지금도 영상 산업에서 컬러의 표현은 가장 치열한 경쟁의 영역이다. 흑백의 세상에서 컬러의 세계로 바뀐 지 불과 백여년 정도 된 것 뿐인데, 영산 산업 기술의 발전은 컬러 구현의 범위를 점점 확장 시키고 있다. 최근 노트북이나 스마트폰 디스플레이의 컬러 영역 소개 내용을 보면 ‘DCI-P3 색 영역을 구현한다’는 것을 종종 확인할 수 있다.

DCI-P3 광색역의 화면 기준은 미국의 영화 산업계의 디지털 영화 위원회(Digital Cinema Initiatives, DCI)에서 제정한 DCI 컬러 기준의 일부다. DCI는 미국 영화방송기술자협회(Society of Motion Picture and Television Engineers, SMPTE)를 통해 각종 디지털 영상 기술 표준과 규약을 집행하고 있다. 최근 영상 시청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영상 감상에 최적화된 색역인 DCI-P3 기준으로 색역을 표현하는 디바이스들이 늘어났다. 사실 색공간의 기준은 sRGB, Adobe RGB, NTSC 등 다양하다. (관련 글 보기: http://news.samsungdisplay.com/14388/)

DCI-P3 색역은 그동안 표준 색역으로 많이 활용되어온 MS와 HP가 협력해 만든 sRGB 컬러 영역에 비해 25% 정도 더 넓은 색역을 가지고 있다. 더 넓은 색역을 표현한다는 것은 이전에 표현하지 못했던 다양한 컬러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모니터나 노트북, 스마트폰용 디스플레이들은 기준 색역 대비 얼만큼 풍성한 색 표현이 가능한지를 두고 화질 경쟁을 펼친다. 최근 삼성디스플레이의 노트북용 OLED 또한 DCI-P3 컬러 볼륨 120%가 넘는 넓은 색 표현력 등을 통해 글로벌 인증 기관인 SGS로부터 ‘시네마틱 익스피리언스’ 인증을 받기도 했다.

▲CIE 색좌표는 국제조명학회에서 제정한 측색 시스템으로, 디스플레이에 색을 표현하는 색체계이다.

고화질 영상 구현을 위해 최근 HDR 기술도 각광받고 있다. HDR의 대표적 규격 중 하나로 자리 잡은 돌비 비전(Dolby Vision)의 디지털 색체계 기준은 매우 까다롭다. 촬영부터 모니터링, 디지털 전송, 영상의 편집과 색 보정뿐만 아니라 최종적인 소비자용 TV까지 광색역(wide gamut)과 HDR 기준을 지키도록 규범화하고 있다. 지금 HDR은 거대한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 영상, 이미지를 비롯한 다양한 콘텐츠들은 물론이고 TV, 노트북 등의 각종 IT 디바이스들은 HDR 구현을 하나의 경쟁력으로 내세운다. (관련 내용 보기: http://news.samsungdisplay.com/14820)

HDR은 가장 밝은 부분부터 가장 어두운 부분까지 다양한 명암의 범위를 확장시켜주는 기술이다. 명암의 범위를 더 디테일하게 구현해, 현실에 존재하는 다양한 밝기를 표현, 영상을 보다 실감나게 전달해준다. 이렇듯 디지털 세계에서 밝기나 명암, 컬러의 발전은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컬러 영상 기술의 역사가 단지 카메라 촬영부터 TV 재현까지 기계적으로 성능을 높이려는 노력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전문가의 손길을 거치는 영역도 있다. 흔히 말하는 색 보정(color correction)과 컬러 그레이딩*(color grading)분야다. 촬영된 영상의 컬러를 더 사실적으로 보정하고 계조를 높이는 것이 원래 목적이었지만, 디지털 컬러 시스템에서는 사라진 컬러를 복원하는 능력도 중요하다.(*컬러그레이딩: 영상, 이미지 등의 색감을 변경하거나 강화하는 과정 )

▲Adobe Premeire에서 영상의 색감 보정을 위해 사용하는 기능

카메라 브랜드마다 컬러 로그(Log) 체계를 개발하여 적용하고 있는데, 뿌연 톤으로 촬영된 영상은 편집 과정에서 마법처럼 선명한 색상으로 되살아난다. 더 나아가 특정한 컬러 스타일을 사전 설정 값, 즉 LUT(Look-up Table)로 만들어 촬영한 영상에 쉽게 변환 적용하는 방법도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이 두가지 모두 하나의 색공간을 다른 색공간으로 변화하는 수학적 모델링의 결과이다.

디지털 컬러 체계의 수학적 호환성 덕에 창작자와 시청자는 더 다양한 컬러 스타일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독특한 색감의 영화나 방송 드라마가 증가했다. 이제는 개인 창작자도 자신만의 컬러 룩을 만들어 쓴다. 죽은 컬러를 살리는 마법은 오늘도 화면과 화면 뒤에서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