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인류가 쌓아온 경험과 관측된 결과를 바탕으로 새로운 현상의 원리를 밝히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언제나 논리적이며 정확해야 하기 때문에, 주로 수학이라는 기가 막힌 도구를 이용한다. 수학은 예외가 없다. 열 개의 사탕 중에 여섯 개를 먹었다면, 무조건 네 개가 남아야만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한 반에 키가 큰 아이들은 몇 명인지 세어보자. 만약 160cm라는 정확한 수치적 기준이 주어졌다면 간단한 이야기겠지만, 단순히 큰 아이들이라는 주관적인 기준을 세우기는 쉽지 않다.
좀 더 일상적으로 가보자. 우리는 평소 집이나 회사에서 쾌적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늘 노력한다. 특히 무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이 오면, 사무실의 적당한 온도를 맞추는 것이 관건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나 굉장히 어렵다. 적당하다는 단어가 갖고 있는 언어적 의미는 모두가 이미 알고 있지만, 이걸 수치적으로 정확하게 맞추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다. 듣기만 해도 정의조차 쉽지 않은 난제처럼 들린다. 불분명한 기준은 수학적으로 정의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 세계의 매우 애매한 기준을 수학적으로 접근하려고 시도하는 이론이 바로 ‘퍼지 이론’이다.
1990년대 세탁기나 청소기 등 대형 가전제품에서 주로 활용된 인공지능의 개념 역시 퍼지 이론과 닿아 있었다. 특히 당시 대한민국의 기업들은 아예 퍼지 이론을 광고의 핵심 키워드로 활용하기까지 했다. 하나의 예로, 지금까지 기존의 세탁기는 세탁물을 통 속에 넣고 세제를 넣은 뒤 정해진 스위치를 눌러서 세탁을 시작했다. 하지만 퍼지 이론이 적용된 인공지능 세탁기는 센서를 통해 세탁물의 중량을 감지하고, 옷감의 종류나 질을 확인한다. 그리고 입력된 양과 질을 기준으로 물의 높이나 물살의 세기, 탈수 시간 등을 가장 적당하게 선택한다.
특히 삼성전자는 별도의 광 센서를 사용하여 세탁물의 오염도까지 측정하도록 했고, 얼마나 많이 오염되었는지에 대한 주관적인 기준을 객관적인 수치와 결과에 반영했다. 이러한 시도들은 아직 퍼지 이론에 대한 상용화 연구가 제대로 정착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꽤 훌륭한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물론 적당한 선택이라는 건 여전히 모호하다. 이런 애매한 개념을 과연 어떻게 수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을까?
현실의 불확실한 상태를 표현하는 수학적 방법
▲ 퍼지 이론을 처음으로 제안했던 로트피 자데 교수. (출처: 위키미디어)
‘퍼지(fuzzy)’라는 단어는 ‘애매한’ 혹은 ‘불분명한’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대놓고 애매모호한 이론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퍼지 이론의 특성 때문에 초기 수학자들에게는 인정받기가 어려웠다. 아제르바이잔이라는 작은 나라의 수도 바쿠에서 태어난 수학자 로트피 자데(Lotfi Asker Zadeh)는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과연 나의 아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와 같은 감정적인 질문에도 수학으로 답을 할 수 있을까? 그는 이미 자동제어 분야에서 상당한 권위를 갖고 있을 정도로 업적이 뛰어났지만, 그럼에도 다른 수학자들은 고개를 저었다. 기존의 수학적 정의나 개념은 한 번도 비슷한 식으로 현실의 문제를 접근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퍼지 이론은 허무맹랑한 장난처럼 보였다. 하지만 자데는 포기하지 않았다. 1965년 그는 퍼지 집합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했고, 이후 퍼지 숫자, 퍼지 논리 등 새로운 개념이 포함된 퍼지 알고리즘에 대한 획기적인 논문을 발표했다. 가장 비 수학적이면서도 수학적인 사고방식의 시작이었다.
명확하지 않은 기준으로 범위를 제시하는 과정
현실 세계에 숨어있는 애매한 문제를 수치로 제시하는 것이 어떤 쓸모가 있을까? 오늘날 컴퓨터는 인류에게 매우 친근한 도구가 되었고, 이제 컴퓨터 없이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을 만큼 의존도가 높아졌다. 단순히 데스크톱이나 노트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접하고 있는 수많은 소형 가전기기나 전자 장비들은 이미 컴퓨터를 통해 대부분이 제어되고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작고 소소한 일들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컴퓨터가 사람을 대신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의 행동 대부분은 애매모호한 정보를 상당히 많이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호한 정보를 모호하지 않은 작업에 활용하기 위해서는 벌어지는 일들을 컴퓨터가 스스로 이해할 수 있도록 수학적인 언어로 바꾸어주어야 한다. 숫자를 계산하고 제대로 된 결과를 도출하여야 비로소 컴퓨터는 가치가 있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변경될 수학적 언어는 매우 정확한 숫자가 되어야 하며, 애매한 표현을 가능한 단순화시켜 정보의 손실을 줄이는 과정에서 퍼지 이론이 기량을 발휘한다.
▲ 퍼지 집합과 소속 함수의 예시를 나타낸 그래프로 퍼지 집합의 개념은 각 대상이 어떤 모임에 속한다 또는 속하지 않는다는 이진법 논리로부터 각 대상이 그 모임에 속하는 정도, 즉 소속도를 소속함수(Mebership function)로 나타낸다.
서두에서 언급했던 젊은 사람이라는 애매한 기준으로 돌아가 보자. 과연 젊다는 것은 몇 살 정도의 범위를 의미할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선 젊다는 용어를 명확하게 정의해야 한다. 사전적으로는 생리적으로 혈기 왕성한 시기를 뜻하며, 보통 10대 후반에서 30대 사이에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범위를 그대로 컴퓨터에 사용할 수는 없다. 통상적으로 수학에서 집합이라는 표현은 특정한 조건에 맞는 숫자들의 모임을 의미한다.
어떤 숫자가 나타났을 때, 그 집합에 속하는지 아니면 속하지 않는지를 확실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퍼지 이론에서는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명확하게 정해져 있지 않는 숫자들의 모임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 이게 바로 ‘퍼지 집합’이다. 우리가 젊다고 표현할 때, 이 범위에 속하는 나이를 적당히 퍼지 집합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소속 함수’라는 개념이다. 전체 집합에 속한 각 원소가 얼마나 집합에 제대로 속해 있는지, 그 정도를 알려주는 것이 바로 소속 함수다.
다시 말하면, 어떤 나이가 제시되었을 때, 그 나이를 젊다고 판단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나타낸다. 17살의 고등학생이 과연 젊은 집합에 포함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부정적인 답변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따라서 17세의 소속 함수는 1이 된다. 하지만 29살은 어떨까? 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백 명 중에 70명 정도이고, 나머지 30명은 결코 젊다는 판단을 내릴 수 없다고 한다면 소속 함수는 0.7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맥락으로, 82세 어르신에 대한 소속 함수는 0이 된다. 즉, 일반적인 컴퓨터가 판단하는 과정이 0과 1이라는 두 개의 숫자만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퍼지 이론은 가능성에 대한 수치를 0부터 1까지의 실수로 표현한다. 빛과 그림자, 단 두 가지의 선택지만 있던 논리의 어둠 속에서, 이제 우리는 무한한 무지갯빛 스펙트럼을 만날 수 있다.
물론 이렇게 보면 마치 확률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퍼지 이론은50%의 확률로 젊을 수도 있지만, 50%의 확률로 젊지 않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50%는 젊지만, 50%는 젊지 않은 상황을 수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즉, 어떤 상태를 결정할 수 있도록 확률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젊거나 젊지 않은 그 사이의 가능성을 표현하는 이론이다.
우리 삶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퍼지 이론
▲ 찬물과 뜨거운 물의 온도를 조절하는 과정. (출처: 위키피디아)
샤워하기 딱 좋은 따뜻한 물을 만들어내는 건 굉장히 어렵다. 물이 차가워서 뜨거운 물을 조금만 더 틀려고 하면, 용암처럼 거의 펄펄 끓는 물이 되어버리는 건 부지기수다. 만약 뜨거운 물의 양을 조절할 수 있는 샤워기를 쓴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뜨겁다는 물 온도로 집합을 구성하는 것이 애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 퍼지 이론이 적용된다. 어떤 온도가 따뜻하다는 집합에 포함되는지를 먼저 고려해서, 그 가능성을 다루는 소속 함수로 퍼지 집합만 만들어내면 된다.
▲ 디스플레이 조명과 전기 밥솥에 적용된 퍼지 이론.
항상 우리 눈앞에서 또렷한 이미지와 영상을 보여주는 디스플레이나 조명에도 퍼지 이론이 적용될 수 있다. 조명을 켜거나 끄는 수준이 아니라, 스위치의 온 오프 사이에 수많은 선택지를 퍼지 이론은 만들어낼 수 있다. 주변 환경에 맞추어 최적의 밝기를 전해준다면, 과도하거나 희미한 빛으로 시력에 무리를 줄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줄일 수 있다.
우리가 항상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게 도와주는 고마운 전기밥솥의 경우도 생각해보자.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밥을 가열하지 않고 두는 0이라는 명령과 밥을 뜨겁게 가열하는 1이라는 명령, 단 두 가지의 방식으로만 작동했었다. 밥은 계속 뜨거워지고 차가워지는 과정을 반복했고, 결국 따뜻한 밥 대신 딱딱하게 말라버린 밥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퍼지 이론이 적용되면서 단순한 두 가지의 명령이 아닌, 다양한 가능성의 수치를 통해 세밀하게 온도를 통제하여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퍼지 이론은 이미 우리 생활 속에 굉장히 밀접하게 다가와 있다.
▲ 빅데이터의 처리과정에서 중요한 퍼지 이론.
이제 정보처리가 가장 중요한 사회가 되었다. 교통뿐만 아니라, 교육이나 의료, 환경, 경제를 비롯한 복잡하게 돌아가는 세상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정보를 매우 빠르게 이용한다. 빅데이터의 고속 처리 과정에서 중요한 건 아주 세세하고 정교한 흑백의 선택이 아니다. 오히려 유연한 사고와 합리적인 해석이 훨씬 적합하다. 퍼지 이론은 이런 상황에 걸맞은 효율적인 추론 방식이다. 이제 자연현상을 연구하는 범위를 넘어, 사회과학이나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미래형 컴퓨터의 개발이나 인간처럼 사고하는 인공지능의 구현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아마 과거에 우리가 생각했던 전망조차 퍼지 이론이 적용되어 만들어진 신기술에 비하면 그 가능성을 충분히 담지 못했을 것이다. 앞으로도 인간과 컴퓨터, 기계와 인간의 사이에서 끈끈한 공학적 연결고리 역할을 해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 이 칼럼은 해당 필진의 개인적 소견이며 삼성디스플레이 뉴스룸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